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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박내옥)

박혁거세의 61세손 박내옥 (朴萊玉, 1912 - 1996)은 옆에서 지켜보았을 때 그야말로 '어머님 숭배자'이셨다. 젊어서부터 쭉 그렇게 살아오신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노년의 삶은 완전히 '아내를 위한, 아내에 의한' 것이었다. 평생 고생시킨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의 자연스러운 결론이기도 하리라.[1] 아내에게 쓰는 편지 요즘 나는 팔순(八旬)에 즈음하여 당신이 아니었던들 내 인생이 어찌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소.[2] 소심하고 성미 급한 나와는 달리 당신은 성질이 온유하고 말이 없으며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소. 우리 생애의 고비마다 당신과 힘을 합쳤기에 4남 5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이만큼 여유있게 지난 생애를 돌이켜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이것은 당신의 타고난 품성 뿐만 아니라 훌륭하신..

은성덕

은성덕 (殷成德, 음1916.09.04 - 2002.07.26)은 박혁거세 왕의 61세손 박내옥 (朴萊玉) 님의 부인으로 1916년에 태어나 2002년 9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평생 박봉의 남편을 도와 자녀교육에 힘썼다. 고인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나라가 봉건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발전하고, 또 식민지배하에서 독립을 맞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치른 후 정치적인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제개발을 완수한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경제발전의 과실을 따먹고 자란 젊은 세대 특히 젊은 여성들은 감히 고인의 일생을 운위하기 힘들 것 같다. 어떻게 스물도 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9남매를 낳아 기르며 쪼들리는 살림에 조카들까지 4-5명씩 거느릴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오..

박내옥

박내옥(朴萊玉) (음1912.05.16 - 1996.08.25)은 시조 박혁거세 왕의 61세손으로 1912(壬子)년 7월 1일 운봉에서 태어나 1996년 10월 7일 세상을 떠났다. 1932년 전주고등학교(全州高普) 졸업 후 금융조합에 입사하여 무주, 남원 등지에서 근무하였다. 1946년부터 주로 미국의 원조물자인 의약품을 취급하던 전북약품(주)에서 재직하였고, 1975년 농업용 비닐을 제조 판매하는 서울일신화학(주)의 감사 직에서 정년퇴임하였다. 평생 회계업무를 담당하였기에 기록 남기기를 좋아했으며, 은퇴 후에는 등산과 여행 등으로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내고 기독교의 믿음을 자손들에게 전하였다. 1934년 학교동창인 은성룡의 소개로 당시 무주군청의 재무과장이던 은치황(殷致黃)의 장녀 은성덕 (殷成德)과 ..

박화옥

박화옥(朴華玉) (음1908.5.25 - 1950.8.16)은 박혁거세 왕의 61세손이다. 박승재 님과 안동 김씨의 3남으로 쌍둥이 아들 중 동생이었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1908년 운봉에서 태어나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해방 전부터 초동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는데 6.25 사변 중 그의 처사에 앙심을 품은 학부형의 밀고로 인민군에게 붙잡혀 1950년 뜻을 펴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 하였다. 교사를 하기까지 자녀교육을 중시하는 가풍에 따라 기옥(琪玉)과 화옥(華玉) 쌍둥이 형제는 일찍이 대처(大處)로 나가 공부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수재만 들어갈 수 있었던 전주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형제가 나란히 합격하여 서로 경쟁하고 의지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전라선 철도가 놓이기..

김창섭 (박진성)

전북 남원 출신 김창섭 (金昌燮)은 박혁거세 왕의 62세손인 둘째집 장녀 진성(珍性)의 부군이다. 슬하에 김원재, 선화, 선미, 선실 등 1남 3녀을 두었으며, 2013년에 회혼을 맞았다. 서울대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마포에서 약국을 경영하다 1973년 미국에 이민하여 LA 지역에서 보험업에 종사하였다. 첫째집 섭용과 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LA 한인문인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2008년 1월 넷째집 처남(박훤일)[1]이 LA 북쪽교외의 몬트레이팍에 사시는 진성 누님 내외분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LA 리틀도쿄에 있는 고급 일식당(Sushi Gen)에 데리고 가서 저녁을 사주셨다. 그리고 결혼 25주년을 맞는 처남에게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2]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이야기지만 ..

박준용 (1963 결혼식)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준용 (朴濬庸, 1935.12.19 ∼ )은 둘째집 박기옥-이규아의 장남이다. 1935년 남원에서 태어나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1961년 농업진흥공사에 들어가 전남지역본부장을 역임하였다. 주로 수리관개 엔지니어링과 농업행정에 종사하였으며 은퇴 후에는 첨단 인터넷 통신을 익혀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겼다. 지인들에게 소운(素雲)이라는 아호를 가지고 좋은 글과 사진, 특히 여행기와 건강정보를 전파하는 것을 큰 낙(樂)으로 삼았다. 1963년 전북 부안 출신의 신소영(辛素英)과 결혼하여 석균, 은경, 성균 등 2남 1녀를 두었다. 19대 국회의원(새누리당)을 역임하고 그 전과 후에 두 차례 대한간호협회장으로 활동하는 신경림 교수가 처제이다.[1] 결..

가족소풍 (1979)

응답하라 가족소풍! 2013년 TV 드라마에서 최대의 화제작은 "응답하라 1994"[1]가 아닌가 싶다. 1994년에 신촌에 있는 대학을 다니던 젊은이들의 좌충우돌 학창시절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나이 지긋한 연배의 많은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한 이유는 오늘날과 너무나 대비(contrast)가 되는 그 시절의 모습과 그 때 사람들의 의식구조 단면(아마도 젊은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놀았을 세대차이 관념?)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 각 부문에서 "응답하라 OOO"는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자 하나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를테면 "응답하라 가족소풍"이라 했을 때 무엇이 떠오를까?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옛날 옛적에 우리들의 소풍은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봄소풍, 가을소풍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