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집안 이야기

미국 여행기 (박내옥)

parks6263 2020. 8. 15. 15:30

미국 여행기는 넷째집 박내옥 님이 1989년 봄 미국의 서부(LA)와 동부(뉴욕)을 여행하고 쓴 글이다.
평생을 회계 담당 '회사원'으로 근무하셨기에 마치 업무일지를 쓰듯이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하셨다. 당시의 생활상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간 자녀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1]

 *          *          *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캐치 프레이즈는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우리 집안에도 세계로 눈을 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4남 훤일 군이 뉴욕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우리 가족의 세계진출

사실 그 전부터 아내가 세계지도를 벽에 걸어놓고 아이들이 나가 있는 곳을 표시하리 만큼 우리집은 상당히 ‘국제화’되어 있었다. 일찍이 1960년대 말부터 3남 훤장 군이 백마부대 용사로 베트남에서, 차남 훤용 군은 직장 연수차 태국 방콕에 다녀온 데 이어, 훤장 군이 두 차례에 걸쳐 무역진흥공사(KOTRA) 해외 주재원으로 호주의 시드니와 인도의 뉴델리에서 근무한 바 있었다. 또 4녀 은희 양이 1980년 미국 LA로 이민을 떠났으며, 1982년에는 5녀 경희 양도 후주 브레스번에 유학 중인 신랑을 따라갔고, 1986년에는 훤장 군도 미국 산호세로 이민을 갔다. 그 해에는 4남 훤일 군도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 화란 정부 장학금으로 학술연수를 떠났으므로 그 무렵에는 가족의 절반이 해외에 나가 사는 셈이었다.

 

그런데 1988년 11월 훤일 군이 다니던 직장에서 뉴욕 발령을 받자 우리 내외의 여권 수속까지 함께 추진을 한다고 했다. 아마도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다가 아들, 손자를 떠나보내고 우리 내외가 너무 서운해 할 것으로 생각하고 위로삼아 그리 한 모양이었다. 훤일 군 연락을 받고 LA에 사는 자녀들도 대환영이었으며 특히 은희 양은 여권 수속을 밟기 위한 초청장을 보내왔다.

그 해 12월 말 훤일 군이 뉴욕으로 떠나자 우리 내외는 마음이 바뀌었다. 1인당 왕복 140여 만원 드는 비용도 문제려니와 아내의 건강을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에 사는 아이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항공표를 그쪽에서 부담할 테니 어서 오시라는 재촉이었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주들을 오래 보지 못한 탓인지 아내가 갑자기 미국에 가겠다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다시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 뉴저지의 유원지에서 4남 훤일 가족과 함께

 

미국 여행 나들이

마침내 1986년 4월 초 미국 대사관 비자를 받아 생전 처음으로 4월 15일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여기에는 서울에 사는 자녀들의 찬조도 적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항공편은 요금이 제일 저렴한 노스웨스트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서울→LA→뉴욕→LA→서울 코스가 1인당 939불(KAL은 1,100불)이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갈아타는 게 많아 불편한 점도 적지 않았다.

1989년 4월 15일 오후 7시 30분. 마닐라를 출발한 노스웨스트 항공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우리 두 노인 내외는 4시간여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설레는 가슴으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보잉 점보기에 탑승하였다. 승객은 주로 필리핀 사람들이었으나 뒷자리가 비어 있어 우리 내외는 간간히 잠도 청하면서 아무 탈 없이 LA까지 갈 수 있었다.

LA 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은 거꾸로 흘러 4월 15일 오후 3시였다. 짐 1개가 늦게 나와 애를 먹었으나 한국인 항공사 여직원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찾아 끌고 밖에 나오니 훤장 군, 삼중 군(은희) 가족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모든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 했다. 이 날 저녁은 우리 내외를 환영할 겸 은희 양의 집에서 집들이 파티를 한다고 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오랜 만에 섭용 군, 김창섭 군, 훤웅 군 등 조카, 사위들과도 해후할 수 있었다.

 

서울특별시 나성구, LA의 인상

LA에는 한인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어 코리아 타운에서는 영어를 몰라도 별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 한다.[2] LA에 체류하는 동안 볼 일 보러 또한 식사하러 코리아 타운에 여러 차례 드나들었는데 제법 기반을 잡고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호랑이표 연고를 사러 들렀던 한인 약국의 주인은 전주고-서울약대를 나왔는데 이민 온 지 10여년 만에 드럭 스토어를 여러 개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부지런한 만큼 시간에 비례하여 재산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그래서 모두들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았다. 훤장 군은 부동산 중개사로서 주말이면 연락도 많고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하므로 우리 내외가 관광 안내를 받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자부(子婦) 역시 피아노 레슨 지도를 하며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사위가 하는 일이란 슈퍼 마켓을 경영하는 것으로 이민 초기에 하였던 가드너(정원사) 일에 비하면 수월하다고 하였으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다른 조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서울에서 화이트칼라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미국에 와서 험한 일을 하는 모습이 역력하였으나 이곳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고 자기가 땀 흘려 일한 만큼 돈을 벌게 되어 있으므로 보람을 찾는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2세들이 공부를 잘 하는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어차피 이민 1세는 그들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훤장 군의 안내로 차를 타고 이름난 관광코스를 돌아 다녔다. 비벌리 힐즈라고 하는 부자 동네에 가 보니 고급주택들이 띄엄띄엄 서 있는데 거리에는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깨끗하였다. 키 큰 야자수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미국 영화의 산지 헐리우드는 남산만한 산 위에 입간판이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옛날에 영화를 만들던 세트장이 그 부근에 군데군데 있다고 하였다. 도쿄 타운에도 가 보았다. 한인 타운은 널따랗게 퍼져 있는 데 비해 이곳은 오밀조밀하게 일본 관계 점포들이 들어차 있었다.

LA에는 대중 교통수단이 없으므로 이리저리 이동할 때 승용차를 이용해야 한다. 자가용이 아니라 생활필수품인 셈이었다. 어느 곳이나 금방 고속도로(프리웨이)가 나타나므로 나가고 들어오는 곳(In & Out)을 잘 헤아려야 한다. 미국 도착한 후 며칠 동안은 동서남북도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4월 23일 일요일 날은 당초 디즈니랜드를 구경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대신 교회에 나갔다. 은희 양 가족이 다니는 동양선교교회(OMC)였는데 예배당이 매우 큰 데도 3부로 예배를 보고 있었다. 사실 딸 내외도 미국에 와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등 교포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임동선 목사로부터 “원수를 사랑하면 그 상이 크고, 남을 비판하지 않으면 나도 비판 받지 아니하고, 주라 그리하면 후히 받을 것”이라는 설교 말씀을 들었다.

 

LA에서 옛날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이영환(전북약품 사장) 씨의 장녀를 만난 것도 뜻 깊었다. 우리 내외가 미국에 온 줄 알고 집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레스토랑을 경영한다는데 풀장도 있고 정원이 넓은 호화 저택에서 잘 살고 있었다.

시카고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영환 씨와도 통화를 하였다. 어려운 시절에 함께 일했던 만큼 미국 땅에 와서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고도 감개가 무량하였다. 나도 자식 잘 둔 덕에 이처럼 호강하며 여행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 LA 3남 훤장의 집에서 손자 재균, 지영이와 함께

LA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말로만 듣던 디즈니랜드를 구경한 일이었다. 4월 30일 일요일 사위 삼중 군의 안내로 디즈니랜드에 갔다. 주차장에 도착한 것이 10시 10분. 넓디넓은 주차장에 온통 차와 사람 투성이었다. 백인, 흑인, 동양인, 중남미 사람(스페인 말을 쓰므로 “히스패닉”이라고 부른다), 뚱뚱한 사람, 홀쭉한 사람, 잘 생긴 사람, 못 생긴 사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입장권은 처음 들어갈 때만 검사하고 탈 것들은 줄을 지어 차례대로 탔다. 제일 먼저 아프리카 정글로 들어가는 배를 탔다. 양편에 열대 우림 사이로 코끼리, 하마, 기린, 호랑이, 사자가 연이어 나타났다. 꼭 살아 있는 것 같은 움직이는 모형이라고 했다.

 

그 다음으로 구경한 데가 「천국과 지옥」. 지옥에서 고통에 허덕이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집과 나무가 불에 타고 쓰러지고 있었다. 그러자 일순 밝은 세상으로 나가는데 사람들이 환희에 차서 웃고 노래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가면서 세계 각국의 인형들이 노래를 합창하며 춤추는 별천지(別天地)를 구경하였다. 한국 인형도 들어 있었는데 신랑, 각시가 장고에 맞춰 춤추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원형극장에 들어가 전면에 영사되는 사진과 웅장한 음향을 감상하였다. 가만히 앉아서 미국의 명소(名所)를 다 구경한 셈이었다. 동심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타 보고 재미있었으나 몸이 상당히 피곤하였다. 구경을 하자면 끝이 없겠기에 4시 반에 디즈니랜드 관광을 마쳤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의 명암

1989년 5월 7일 우리 내외는 예약한 대로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중간에서 비행기가 착륙하여 많은 승객이 내리고 탔다. 오후 3시 뉴욕에 도착하였는데 뉴욕 시간으로는 오후 6시였다. 미국 땅이 얼마나 광대한지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오는 데 비행기로도 7시간이 걸리고 세 시간씩이나 시차가 났다.

가방을 찾아 출구로 나오니 훤일 군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달 못 본 사이에 두 손자도 많이 큰 것 같았다. 공항에서 한 시간쯤 달려 뉴저지 훤일 군이 사는 집에 오니 온 동네가 숲속에 쌓여 있었다. 집들도 깨끗하고 서울의 외인 주택들과 비슷하였다. 나무도 별로 없고 황량한 느낌마저 주던 LA에 비하면 별천지 같았다. 다만, LA에서는 드물다는 비가 너무 자주 와 날씨가 음산한 게 흠이었다.

 

훤일 군이 안내하여 뉴욕 시내 관광에 나섰다. 뉴저지와 뉴욕 맨해탄 사이에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라고 하는 이층으로 된 현수교가 걸려 있었다. 허드슨 강은 한강만큼이나 폭이 넓었고 뉴저지 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맨하탄 쪽에서는 강변도로를 통해 시내로 진입하였는데 안쪽은 “할렘”이라고 부르는 매우 지저분한 흑인 빈민가라고 하였다. 훤일 군 사무실 부근에 차를 파킹해 놓고 도보로 센트랄 파크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거리가 생각보다 지저분한데 공원 벤치에 일없이 앉아 있는 거지들이 눈에 띄었다. 지하철 역에는 집없이 떠돌아다니는 홈리스가 더 많다고 하였다. 두 손자들이 졸라 공원을 일주하는 마차를 탔다. 센트랄 파크에서 혹자는 뜀박질하고, 혹자는 공원 잔디 위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무척 한가로워 보였다.

센트랄 파크에서 나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백화점, 보석상, 성패트릭 성당, 록펠러 센터 빌딩, 공립도서관 등을 차례로 (일부는 버스에 탄 채로, 일부는 도보로) 구경한 다음 사진으로 보았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갔다. 맨하탄의 위 아래로 고층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데 63빌딩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풍경하고 사뭇 달랐다. 쌍둥이 빌딩과 뉴욕 항구 저 너머로 자유의 여신상이 조그맣게 바라다 보였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내려와 인근 한식집에서 곰탕, 불고기 백반을 들었다. 뉴욕 시내 한복판에도 한국 교포 가게가 즐비하였다. 한국민의 강인한 생활력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훤일 군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 코리아 타운은 본래 우범지역이었는데 교포 상인들이 가게를 얻어 부지런히 장사하고 주변 청소를 하면서 모범지역으로 탈바꿈한 곳이라고 하였다. 역시 주말인데도 거리에는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흑인들이 있었다. 흑인이나 남미에서 이민 온 히스패닉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트집을 잡아 일쑤로 돈을 갈취하므로 이 부근을 밤에 혼자 다니기에는 위험한 곳이라 했다.

홈리스와 범죄, 마약, 에이즈(AIDS)는 뉴욕시가 당면한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미국의 사회가 경쟁이 치열한 만큼 학식이나 체력면 에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무제가 있는 사람은 홈리스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약은 홈리스나 하류층 흑인뿐만 아니라 중산층 백인사회와 청소년들에까지 파고들어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에이즈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고 하였다. 통계상으로 뉴욕 시내 병원 응급환자의 1/4이 에이즈 보균자인 것으로 밝혀졌다니 이는 무섭고도 엄청난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에 망조(亡兆)가 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 우리가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보았지만 이렇게 광활하고 비옥한 국토를 가진 나라는 아직도 많은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5월 14일 일요일 훤일 군 식구와 같이 허드슨 교회에 예배 보러 갔다. 외양은 근사한 천주교 성당인데 한인 장로교회에서 인수하여 쓰고 있었다. 미국의 기독교 신자가 줄어들어 있는 교회도 문을 닫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한국민들은 안 믿던 사람도 미국에 와서 교회를 다닌 형편이니 어찌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오늘은 어버이날이라 하여 지하 식당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예배가 끝난 후 뉴지지 중부에 있는 유원지로 놀러갔다. 고속도로는 넓고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뉴욕에서 멀어질수록 다니는 차량도 별로 많지 않았다. “대모험”(그레이트 어드벤쳐)이라고 부르는 유원지에는 차에 탄 채로 야생동물을 구경하는 동물원이 나란히 있었다. 아이들은 차에 접근해 오는 염소, 타조,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며 즐거워했다. 코끼리도 여러 마리 있었는데 전기 철사줄을 쳐놓아 위험은 없어 보였다.

그 다음은 놀이 마당(테마파크)으로 갔다.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우리 내외도 동심으로 돌아가 케이블 카도 타고 통나무 배(플룸라이더)도 타보고 공중을 나는 배도 탔다. 그러나 공중곡예를 하는 열차(롤러코스터)는 내 나이에 위험하다고 하여 못 타본 것이 좀 아쉬웠다.[3]

 

* LA 이민 10년이 되어가는 4녀 은희네 식구와 함께

 

이민 1세대의 애환

5월 27일 다시 LA로 갔다. 훤일 군은 섭섭한 기색이었으나 부모님 마음 편하실 대로 하시라면서 “저는 2년 반 후면 서울에서 뵈올 터이니 LA에서 형, 누나와 하루라도 더 오래 계시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였다.

훤장 군은 그 사이에 이사도 마쳤고 아버지 생신도 다가오므로 생신잔치 겸 집들이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6월 3일 토요일 LA에 사는 조카들을 다시 한 자리에 불렀다. 섭용 군은 동창회 모임도 빠지고 달려왔다. “처음 막 도착해서는 살 길이 막연하였으나 이민생활의 연륜이 쌓이면서 요령도 생기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공부 잘 하고 제 앞가림을 해주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훤장 군을 보더라도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전 중이지만 오랜 해외근무 덕분에 영어도 잘 하고 상담에도 능하므로 큰 걱정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므로 적이 안심이 되었다. 다만, 미국에서는 예외 없이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하는데 자부의 건강이 맣은 학생들의 피아노 레슨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 점이 염려되었다.

은희 내외는 팔 걷어붙이고 생활 전선에 나선 결과 이제는 목 좋은 곳에서 상당한 규모의 수퍼마켓을 경영하고 있어 더 바랄 게 없었다. 앞으로의 희망이라면 2세들이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공부를 잘 하여 하루 속히 미국 사회의 주류(主流)에 편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내외가 미국에 이민 와서 고생하고 있는 아들,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권속들에게 건강과 활력을 주시고 굳건한 믿음을 허락해 주셔서 미국 땅에서 하루 빨리 기반을 잡을 수 있게 해주십사”고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 원주민을 제치고 우리 땅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Note

1] 출처: 박내옥, 팔순문집 [아버지 朴萊玉의 八十平生], 1992.

2] 그래서 한국 교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로스안젤레스(LA)를“서울특별시 나성구”라고 부르곤 하였다.

 

3] 4남의 입장에서는 뉴욕에 부임한 지 넉 달만에 부모님이 오셔서 미국 지리에 익숙치 못한 탓으로 장거리 여행에는 나서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가지 못하고 펜실베니아 주의 포코노 지역에 있는 부시 폭포만 구경시켜 드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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