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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을용 (추모)

박을용 (朴乙鏞, 1936. 6. 5 - 2004. 4. 12) 님은 벌써 오래 전 2004년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고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한동대학교 동료교수와 제자들이 인터넷[1]에 올린 추모의 글들을 여기 전재한다. 추모사 한동대 교수 김학철 박을용 교수님의 마지막 일년은 죽음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시고 싶었던 말씀을 다 담으셨습니다.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면서도 학생들을 향하여 ‘사랑’이라는 한마디를 남기시고 기운이 진하여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아무것도, 대수술도 박교수님의 꿈을 앗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해 봄 대수술을 받으신 후에도 한동을 향한 소망은 포기할 수 없는 것..

박을용 (2004 장례식)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을용 (朴乙鏞, 1936. 6. 5 - 2004. 4. 12)은 1938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에서 태어나 2004년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하버드 대학 정치경제학 박사로서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원과 한동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온누리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1969년에 조 형(趙馨)과 결혼하여 아들 유진(惟辰)을 두었다. 장례식은 2004년 4월 14일(수) 하용조 목사의 집전으로 온누리교회장으로 거행되었다. 묘소는 문막 온누리교회 묘지에 있다. 생애와 업적 2004년 부활절을 보내고 하늘나라로 가신 박을용 장로님의 약력을 소개합니다. 고인은 1938년 6월 5일 지리산 자락의 전북 남원군 운봉면 서천리에서 태어나서 1957년 전주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셨..

홍난파 (박호현)

운봉 박씨와 사돈을 맺은 집안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적지 않다.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호현 (朴皓炫, 1932.10.20 ~ ) 의 장인 난파 홍영후 (蘭坡 洪永厚, 1898 ~ 1941)도 그 중의 한 분이다. 유난히 폭염이 심했던 2013년 여름 난파 음악상 수상거부 소동이 벌어졌다.[1] 수상 예정자였던 음악인들의 올곧고 외곬수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옥고를 치르고 그때 얻은 병마로 일찍 세상을 뜬 난파 선생의 삶에 비추어보면 오해[2]가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그들은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을 통해 난파가 우리 민족에 전해주려 한 메시지에는 귀를 닫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비오는 날 한길에 끌려 나갔다가 흙탕물 세례를 받은 것을 보고 나무라는 격이 아..

나의 꿈 (박섭용)

나의 꿈은 여든이 넘은 어느 이민자의 꿈이 어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섭용(朴燮鏞, 1928.12.6 - 2016. 4.12)은 운봉 박씨 집안의 종손(宗孫)이었다. 그는 1978년 5월 미국 로스안젤레스로 이민을 떠나 홍균, 양선, 계연 등 1남 2녀를 UCLA 등 명문교에 진학시키고 새 땅에서 기반을 잡게 한 다음 은퇴하였다. 그럼에도 항시 집안의 종손임을 잊지 않고 고향 운봉을 그러워하는 글을 여러 편 동창회지 등에 기고하였다. 아래 소개한 글도 그 중의 한 편이다. 다음 사진은 2012년 여름 미국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중에 아들 내외, 두 딸, 사위, 손주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나의 꿈 친애하는 S형에게,[1] “나는 꿈이 있네”라 하니 1963년 미국 워싱턴D..

박섭용

박섭용(朴燮鏞, 1928.12.6 - 2016.4.12, 아호는 梅山)은 박혁거세 왕의 62세손으로 운봉 박씨 집안의 종손(宗孫)이다. 그는 1978년 5월 미국 로스안젤레스로 이민을 떠나 홍균, 양선, 계연 등 1남 2녀를 UCLA 등 명문교에 진학시키고 새 땅에서 기반을 잡게 한 다음 은퇴하였다. 2016년 4월 향년 88세로 소천하였다. 봄길 같은 사람 필자(박훤일)가 섭용 형님을 생각할 때면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서로 좋은 말을 전하시며 화목을 다지셨다. 이민을 가신 후에도 고향 선영을 돌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하셨다. 봄 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

파평 윤씨 (61世 손부)

박혁거세 61世 손부 파평 윤씨, 윤보처화 (尹寶處華) 님은 1896년 음 정월 초엿새(1896. 2. 18) 운봉면 북천리에서 윤상원-임실 문씨 사이에서 2남 4녀의 장녀로 태어나 박주옥 님의 정부인으로서 93세 장수하시고 1988년 9월 4일 세상을 뜨셨다. 유가(儒家)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기에 16세이던 1912년 1월 운봉 박씨 집안에 시집을 와서 불평을 모르고 봉제사를 하며 조부모와 젊으신 시부모를 모시고 장손 며느리로서 사셨다. 시집 오자마자 태어난 넷째(박내옥) 이하 시동생들과 시누이들을 마치 동생처럼 자식처럼 키우고 보살피셨다. 특히 1951년 부군과 사별한 후에도 홀 시아버지를 정성껏 모셔 "운봉 고을의 효부(孝婦)"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낙상으로 드러누우시기 전까지는 노년까지 건강..

박주옥

박혁거세 61세손 박주옥 (朴湊玉) 님은 1899년 10월 23일 박승재-안동 김씨를 부모로 운봉에서 태어나 6.25 와중인 1951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영모(永模)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1911(辛亥)년 음11월 14일 13세의 나이로 같은 고을의 16세 파평 윤씨 (尹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셨다. 3, 4대가 모여 살며 농사 일을 해야 하는 대가족 농촌 가정의 6남 3녀 9남매 중의 장남으로서 소임 이상의 역할을 다하셨다. 일찍이 한문과 근대학문을 익혀 금융조합(현 농협은행) 서기로 들어가 일하셨다. 동생들 교육에 헌신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박봉을 쪼개 바로 밑 기옥(琪玉)과 화옥(華玉) 쌍동이 형제를 대처에 있는 전주고등학교에 유학을 보내셨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대구사범 강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