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운봉

황산대첩

parks6263 2020. 8. 15. 11:10

황산대첩(荒山大捷)은 전라북도 운봉과 인월 사이의 황량한 산야로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의 대군을 무찔러 대승을 거둔 곳으로 유명하다.

 

왜구의 준동

일본은 왕조가 바뀌지 않고 천황이 만세일계(萬世一系)로 다스려 왔다고 하지만 중앙권력이 약해지면 지방의 세력이 발호하곤 하였다. 특히 해안지방의 무력집단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되었고 중국과 한반도의 해안지방을 약탈하기 일쑤였다.

왜구(倭寇)의 준동은 13∼16세기 고려 말, 조선 초에 가장 심했는데 특히 1350년 이후 30여년간은 피해가 너무 큰 나머지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구의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빈번하였으며 그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1] 왜구는 일본 남북조 혼란기의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九州) 일대의 일본인들이 뛰어들었는데 그들의 근거지는 쓰시마(對馬島), 마쓰우라(松浦), 이키(壹岐) 등지였다.

 

14세기 왜구의 침략

왜구는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지방을 침범하고 곡식과 물자를 약탈해 갔다. 특히 호남지방이 곡창지대임을 알고 여수와 남해 일대에 출몰하면서 섬진강을 타고 올라와 내륙으로 침투하였다. 그리하여 왜구는 선량하고 싸울 줄 모르는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상하고 물자를 탈취해갔다. 특히 고려의 연안 조운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세미(稅米)를 운반할 수 없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백관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못 할 지경이었다.

고려 32대 우왕 5년(1379) 왜구는 또 다시 큰 무리를 지어 섬진강, 요천강을 거쳐 운봉에까지 진격해 왔다. 또한 함선 500척을 몰고 금강 하구에 몰려든 왜구는 진포에서 신식 화포로 무장한 고려군에게 크게 패퇴하였다. 왜구 패잔병들은 내륙으로 쫒겨 들어가 도처에서 분탕질을 일삼고 사근내역에서는 고려 군대와 일진일퇴를 벌였다. 이들은 인월에서 아지발도(阿只拔道)도 이끄는 대부대와 합류하였다.

지리산록 이 지역은 그 지세나 위치로 보아 전라, 경상, 충청 삼도(三道)를 휘어잡을 만한 요지인 터라 정부에서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고려군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왜구와 몇 차례 접전이 있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왜구의 전의를 돋울 뿐이었다. 당시 왜구를 지휘한 장수는 얼굴부터 발끝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아지발도였다. 나이가 어림에도 그는 날쌔기가 비호같고 용맹함은 홀로 백 명을 상대하고도 남았다. 아지발도는 지리산 기숡의 인월에 진영을 구축하고 약탈한 곡식을 저장하여 장기전을 펼 태세를 갖추었다.

 

이성계의 출정

1380년 고려 조정에서는 왜구를 뿌리째 뽑기 위해 이성계를 삼도 도순찰사에 임명하고 아지발도의 왜구 세력을 격퇴하도록 명했다. 이성계 토벌군에는 문신 정몽주와 활 잘 쏘는 이지란도 있었다. 1380년 가을 이성계 장군은 남원의 여원치 고개를 넘어 운봉에 도달한 후 동쪽으로 4km 떨어진 화수리 황산으로 진군했다. 북소리 나팔소리를 울리며 대부대가 아지발도 휘하의 왜구 병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지발도의 지휘 하에 인월을 떠난 왜구 부대는 서쪽으로 행군하다가 이성계 휘하의 고려 군사와 맞닥뜨렸다. 왜구는 크게 주저함이 없이 기병을 앞세워 고려 군사의 후미를 치려 했으나 이를 예상했던 이성계의 고려 기병들과 전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구의 표적이 된 이성계는 여러 번 말을 갈아타며 적이 쏜 화살에도 불구하고 맹렬히 싸웠다.

 

 

황산대첩

왜구의 선봉에서 갑옷을 번뜩이며 아지발도가 백마를 타고 거침없이 달려 왔다. 과연 아지발도의 용맹 앞에 고려군은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계와 이지란은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아지발도를 격퇴하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아무리 화살로 명중을 시키더라도 그를 쓰러뜨릴 수 없으니 두 장수가 협동작전을 펴기로 한 것이다. 한 사람이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맞추어 입을 벌리게 하고 그 다음 사람이 목구멍을 쏘아 맞추기로 약속을 했다.

 

먼저 이성계의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가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혔다. 투구가 벗겨지려 하자 아지발도가 입을 벌렸다. 그 순간 이지란이 쏜 화살이 벼락처럼 아지발도의 목구멍에 박혔다. 아지발도는 비명도 지르지 못 한 채 피를 뿜으며 땅에 고꾸라졌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고려 군사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자 왜구들은 혼비백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도망치는 왜구들은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고려 군사의 칼 아래 맥없이 쓰러졌다. 수많은 마필과 무기를 내던지고 겨우 100여 명의 왜구만이 간신히 지리산 속으로 도망쳤을 뿐이다. 이때 왜구들이 흘린 피가 땅과 냇물을 온통 피로 물들여 1주일이 지나도록 핏빛이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왜구는 더 이상 호남지방에 쳐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주 오목대 자축연

황산에서 왜구에게 대첩을 거둔 이성계 휘하의 군대는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주 오목대(梧木臺)에서 전주 이씨 종친들과 자축연을 벌였다. 저 아래 전주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평평한 자리에 둘러앉아 오랫동안 백성들을 괴롭혀 온 왜구를 물리친 기쁨에 이성계는 중국 한나라 유방의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로써 변방의 장수가 국가적 영웅이 되고 훗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키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Note

1] 왜구(倭寇)란 말은 본래 "왜인이 도둑질한다"는 뜻이었으나 고려 말 이래 그들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왜인들의 해적 행위', '해적질 하는 왜인'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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