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운봉

운봉과 운봉 박씨

parks6263 2020. 8. 15. 11:00

밀양박씨에서 갈라져 나온 운봉박씨가 어떻게 운봉에 터잡게 되었는지 역사기록을 통해 알아본다.

 

운봉 지명의 유래

운봉(雲峯)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원군(南原郡)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백두대간 지리산 동편의 고원분지에 위치하며, 읍내의 하천은 람천에 모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동쪽에는 산내면, 남쪽은 주천면, 북쪽은 산동면, 서쪽은 이백면과 접하고 있다. 현재 읍 소재지인 서천리를 비롯한 주촌리ㆍ덕산리 등 17개 법정 리가 속해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천령)에 의하면 본래 신라(新羅)의 무산현(毋山縣) 혹은 아영성(阿英城)ㆍ아막성 (阿莫城)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운봉현(雲峯縣)으로 고쳐 천령군(天嶺郡)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사지리지』(남원)에 "경덕왕이 천령군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 와서 남원부에 소속시켰다. 이 현에 요해처로서 팔량 고개가 있는데 현(縣) 동쪽으로부터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다"는 기사 내용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 읍치를 두었다.[1]

1912년에는 운봉군은 7개 면, 108개 동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1914년 운봉군은 남원군 운봉면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운봉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운봉 박씨

운봉박씨(雲峯朴氏)는 신라 경명왕의 제1왕자인 밀성대군 언침(彦忱)의 11세손으로 박혁거세 40세손인 고려말 도첨의찬성사 박중화(朴仲華)를 중시조로 한다. 그의 증손 신(信)은 조선시대 찬성사,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인 박종우(朴從愚)가 태종의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졌고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조에까지 4대에 걸쳐 명신으로 이름났던 박 신(朴信)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세종때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앞서 선공감제조로 있을 때 부하관리의 부정사건에 책임을 지게 되어 13년 동안이나 유배지에서 생활했다. 그는 종지(從智), 종우(從愚), 종귀(從貴) 3형제를 두었다.

 

운봉박씨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중화(仲華)를 시조로 받들고 운성군파를 이루었다. 운봉(雲峯)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한때 운봉 일대에 박씨 집성촌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남원으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연재가 직선화되고 운봉읍이 남원시의 교외지역이 되면서 박씨 사람들은 대거 타지로 떠나고 운봉읍에는 타성(他姓)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Note

1] 『호구총수』에서 읍내면ㆍ남면ㆍ서면이 현 운봉읍에 해당하고 읍내면은 동천리(東川里)ㆍ현두리(縣頭里)ㆍ객하리(客下里) 등 다수의 동리 명칭이 확인된다. 『여지도서』에는 17세기 중반의 운봉현은 동면ㆍ산내면ㆍ남면ㆍ서면ㆍ북상면ㆍ북하면ㆍ읍내면 등의 8개 방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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