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운봉

운봉의 환경

parks6263 2020. 8. 15. 10:40

운봉 박씨 자손 중에 현재 운봉에 거처를 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방 전후부터 대처(大處)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이전에 모두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직 선영에 여러 조상 묘가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운봉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1]

 

 

지리적 환경

운봉은 '구름에 싸인 봉우리'라는 지명 그대로 지리산 주능선의 북서부에 위치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남동쪽으로 덕두산(1150m)등 해발 100m가 넘는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북쪽으로 황산, 서쪽으로는 고남산(846m)에 둘러싸여 있다.

산골짜기에서 동천, 서천이 흘러나와 그 주변에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처음 와보는 사람은 산 속에 갑자기 넓은 평야가 나타나므로 깜짝 놀라게 마련이다.

지리산 등반을 하는 경우 대부분 88 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에서 인월로 빠져나와 곧장 뱀사골로 들어가게 마련이므로 운봉은 등산객들에게도 낯선 곳이다.

 

* 봄꽃과 가을단풍으로 유명한 지리산 뱀사골의 가을 풍경

지리산 산기슭에 자리잡아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일찍부터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외에 벼농사를 지어 주민의 생각이나 가산이 넉넉한 편이다. 전라북도 내에서 제일 먼저 추수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외부의 간섭이 없고 먹을 것이 풍족하니 인심은 절로 좋게 마련이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주변 산세가 한결같이 살기를 벗고 있어 큰 인물이 나는 땅으로 알려져 있고 동학 농민전쟁 때나 해방후 빨치산 전투에서도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

남원에서 경상도 함양을 거쳐 대구로 가는 교통 요지로서 1970년대 이후 면양 목축, 지리산 관광자원의 개발이 추진되면서 남원-운봉간 도로가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흔아홉 구비의 여원치(연재)가 난관이었으나 지금은 남원의 시내버스가 운행할 정도로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88 고속도로가 북쪽으로 멀지 않다.

 

역사적 배경

역사적으로 운봉은 전라ㆍ경상 양도의 접촉지역으로 중시되었으며 특히 고려말에는 이성계가 이 부근 황산벌에서 왜구를 섬멸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직도 '비전'이라는 동네에는 이성계의 황산 대첩비가 서 있다.

운봉은 또한 흥부ㆍ놀부전의 발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준 박을 타서 부자가 되었지만 본래 성이 朴氏였다. 춘향전에서는 거지로 변장한 암행어사를 알아보는 눈치 빠른 운봉 현감이 등장한다.

운봉은 박혁거세(朴赫居世) 대왕으로부터 40세조인 中始祖(仲華)가 고려 때 총리(都僉議贊成事) 벼슬을 하고 운봉군으로 봉함을 받은 후 그의 식읍(食邑)이 되었다. 조상 중에 큰 벼슬을 한 분은 별로 많지 않았어도 雲峯은 대대로 운봉 朴氏가 모여사는 본거지였다.

 

59세조 行자祚자 할아버지(오른쪽 사진)가 교육입국의 뜻을 세우고 만성소학교를 설립하심으로써 두메산골 운봉에도 근대적인 학교가 세워졌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200여호가 사는 가운데 만석군, 천석군이 여럿 있었고 대부분 지주 아니면 자작농이었다. 지금은 옛날 부자들은 간 곳이 없고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행세를 하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60세조인 壬자淳자(개명후 升在) 할아버지는 13세에 가정을 이루고 92세를 일기로 작고하실 때까지 운봉을 기반으로 개척정신을 발휘하여 농지를 보존하셨으며, 9남매를 열심으로 가르치셔서 전라도에서 이름난 집안으로 만드셨다.

지금은 58세조인 文瑛公, 59세조인 行祚公, 그리고 60세조인 升在公의 산소가 모두 용산리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니 모름지기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전세계로 힘차게 뻗어나게 한 근거지로서 이곳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2013년 귀국했을 때 운봉 선영의 文瑛 할아버지 산소를 성묘한 박섭용

 

Note

1] 박내옥, 팔순기념문집 [아버지 朴萊玉의 八十平生],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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