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운봉

지리산 등정기 (박내옥)

parks6263 2020. 8. 15. 10:50

智異山 天王峰

1980년 5월 3일 ∼ 5월 5일

 

지리산 기슭에서 태어난 내가 천왕봉에도 못올라봄이 한스러워 연초부터 계획을 세우고 여기저기 등산 정보를 수집하였다. 우선 내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가장 쉬운 코스를 물색하기 위함이었다. 심지어는 中山里 국민학교 교장한테 문의 편지를 내어 친절한 회답을 받기도 했다.[1]

 

마침 어린이 날 연휴를 맞아 「설암 산악회」에서 천왕봉 등정을 한다기에 나도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문제였다. 연속 7주째 주말만 되면 비가 내렸는데 5월 3일 토요일에도 비가 예상된다는 예보였다. (故 박정희 대통령의 원혼이 주말 날씨를 궂게 만든다는 속설마저 나돌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지리산으로 출발하는 주말 오후부터 가랑비(細雨)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 때문에 일부 회원의 도착이 늦어져 예정시간보다 지연된 오후 4시 15분에 서울을 출발하였다. 전주-남원-운봉-인월을 거쳐가는 동안에도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마천(馬川)에는 밤 11시 30분 도착.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1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5월 4일 아침 6시에 일어나보니 빗줄기가 사뭇 굵어져 있었다. 심란한 기분으로 조반을 들고 7시 10분 버스에 올라 계곡을 끼고 한참을 올라가니 백운동(白雲洞)이다. 이름처럼 안개가 자욱히 깔려 있고 맑은 계곡의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보슬비가 그칠 기미가 없이 내리므로 모두들 우의를 꺼내 입고 7시 30분 등산을 개시하였다. 나는 선두 대열에 끼어 올라갔다. 우의는 바람이 통하지 않으므로 무척 땀이 나고 더웠다. 이윽고 하늘이 개이면서 비는 멈추었으나 사방이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 오르고 또 올랐다. 계곡을 끼고 올라가는 길이 돌과 바위가 많은 데다 상당히 가파르다. 뒤따라 오는 회원들이 자꾸 처지므로 리더가 선두의 전진을 정지시켰다. 나는 쉬었다 가면 더 힘이 들 것 같아 동일한 보조로 계속 올라가기로 했다.

 

하동 바위를 지나 샘이 있는 곳에서 전원이 휴식을 취하였다. 계곡의 물이 맑고 시원하여 물 속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손을 씻는 것으로 가라앉혔다. 앞으로 장터목까지는 물이 없다 하므로 나는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간식으로 빵을 먹었다. 백운동에서 하동 바위 위쪽 능선까지는 약 4km이나 길이 험하여 2시간 정도 걸렸다. 잠시후 다시 출발. 마침내 능선에 오르니 시야가 넓어지며 평탄한 길이 나온다. 돌이 없으니 걷기도 훨씬 수월하였다. 땅이 기름진 탓인지 온갖 식물이 잘 자랐고 山竹이 많이 눈에 띄었다. 군데군데 철쭉꽃이 피어 있었다.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장터목에 도달하니 멀리 천왕봉이 보였다. 능선에서 장터목까지는 약 5km, 1시간 30분 소요.

 

하얀 구름이 발아래서 솟아 오른다. 장터목에는 산장과 매점이 있었다. 어제밤에도 80여명이 묵고 갔다고 한다. 나는 기운을 돋우기 위해 가지고 간 매실주를 한 잔 마셨다. 힘이 다시 솟는 것 같았다.

다시 천왕봉을 향해 진군을 개시하였다. 경사가 상당히 심한 편이다. 정상까지는 3km. 숨이 너무 차서 깔딱 고개라고 이름 붙인 코스도 있다. 좁은 길에 올라가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좀더 힘을 내라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는다. 쉬지 않고 꾸준히 걸었다. 주변의 큰 나무들이 산불에 타 잔해가 보기 흉하였다. 저멀리 정상에 사람들이 보였다.

 

드디어 12시 15분 대망의 천왕봉(天王峰)에 올랐다. 해발 1915m. 장터목에서 3km, 1시간 15분이 소요되었다.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저 아래 지리산 자락에서 자란 내가 오랜만에 귀향하여 어머니 품에 안긴 기분이 들었다. 하늘은 활짝 개었고 소슬 바람이 매우 시원하였다. 지리산 만봉 위에 군림하는 천왕봉의 산세가 웅장하였다. 기념사진도 찍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 12시 50분 3km 상거해 있는 법계사(法界寺)를 향해 하산을 시작하였다. 돌길의 경사가 심하여 방심하고 걷기에는 위험하기조차 하였다.

법계사에 도착하니 정각 2시다. 법계사는 6.25때 불에 타 지금 대웅전 건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 자재의 운반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하려는 인간의 비원이 느껴졌다. 그보다는 이 일대에서 벌어진 피아간의 치열한 전투가 가슴을 저몄다. 6.25 후 지리산에 잔류한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쌍방이 흘린 피가 철쭉꽃보다 더 붉었다고 한다. 이러한 민족의 비극은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지.

 

점심을 마치고 2시 30분 선두 그룹에 끼어 하산을 계속하였다. 끝없는 돌밭길을 걷고 또 걷고 지루한 하산길을 재촉하였다. 이 코스로 올라오는 사람도 많았다. 중산리(中山里)까지의 6km는 단조롭고 지루하였다. 계곡에 유유히 흐르는 물이 때로는 바위에 부딪혀 하얀 물살을 이루는 것을 보니 뛰어들고 싶었다. 한참을 내려가니 경상도 땅으로 저 멀리 넓은 길이 보였다. 우리 차가 기다리고 있구나!

오후 4시 반에 지리산 등정을 마쳤다. 천왕봉과 법계사에서 휴식한 시간을 포함하여 백운동에서부터 9시간이 걸린 셈이다. 산악회 회원들이 칠순(七旬) 노인을 잘 대접해 준 점도 있지만 내 자신의 체력이 9시간의 산행을 극복한 것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남한 땅의 거봉을 정복했으니 다음에는 노고단마저 올라야겠다.

 

 

智異山 老姑壇

1983년 9월 30일 ∼ 10월 1일

 

1980년 5월초 지리산 천왕봉에는 오른 바 있으나 그 유명한 노고단(老姑壇)은 가보질 못하여 충분한 자랑거리가 되질 못하였다. 더욱이 피아골 계곡의 단풍은 천하일품이라기에 가을철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1983년 10월초의 연휴를 이용하여 노고단 산행을 하고자 산행(山行) 벗인 尹 영감에게 제의하였던 바 자기도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며 찬성하였다. 2박 3일 예정으로 화엄사-노고단-피아골의 코스를 잡았다.

 

9월 30일 아침 일찍 서울역에 나가 구례(求禮)까지 가는 특급 열차표를 샀다. 8시 30분에 출발한 전라선 열차에는 빈 자리가 많았다. 열차는 오곡백과가 황금 물결치는 들판 사이로 달렸다. 논산, 강경의 평야와 이리, 삼례의 평야에는 가을의 풍요로움이 넘쳐흘렀다. 곡성을 지나 파란 강물이 여유롭게 흐르는 섬진강을 건넜다. 내가 오랫동안 살아온 전라도 땅이었건만 생소하게 느껴졌다.

오후 2시 20분 예정 시각에 구례구역에 도착, 3시발 버스로 화엄사로 향했다. 인근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화엄사 경내를 돌아보았다. 요리에 탁월한 솜씨를 가진 尹 영감이 식사 당번을 맡아 음식이 맛있었다.

 

10월 1일 새벽 4시 45분에 일어나 엊저녁에 해놓은 밥에 찌개만 끓여서 먹고 6시 30분 정각 숙소에서 출발하였다. 큰 길에 나서니 이른 시간임에도 부근 여관에서 잔 사람, 캠핑장에서 야영한 사람들이 원색의 등산복 차림으로 길을 메우고 있었다. 혹자는 일도 없는 노인이 일부러 휴일날 등산을 하느냐고 하겠지만 휴일이 되어야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루한 줄 모르고 힘든 길을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화엄사를 왼편으로 하고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이른 새벽 숲속에는 안개마저 서려 있고 계곡의 물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양켠 수목이 터널을 이루어 동이 텄음에도 어두움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갈수록 길이 험하고 경사가 급해졌다.

천왕봉으로 가는 사람, 반야봉을 거쳐 뱀사골로 가는 사람들과도 만났다. 정교하게 쌓아올린 돌 계단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여기가 「중재」라고 한다. 더 경사진 길을 오를 때에는 땀이 비오듯 하였다. 이르기를 「코재」라 한다. 산이 코 앞에 닿을 정도의 급경사라는 뜻일 것이다.

한참을 더 기를 써가며 발길을 재촉하여 올라 갔다. 이 힘든 고생을 사서 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집에 앉아 TV 채널이나 돌리고 있는 사람은 이 기분을 모를 것이다. 힘들여 올라간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땀흘려 고생스럽게 오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푸른 하늘이 보이고 능선이 나타났다. 평탄한 큰 길이 보였다. 바로 노고단이로구나! 나도 모르게 만세 삼창을 하였다. 이때가 10시 정각. 화엄사가 있는 계곡이 저 멀리 아래로 보일듯 말듯 어슴프레 하게 보였다. 산아래는 온통 구름 바다였다.

노고단은 1508m의 높은 산꼭대기에는 군용도로가 잘 닦여 있고 모래를 가득 싣고 올라오는 트럭도 눈에 띄었다. 갑자기 30년전 이 일대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이 연상되었다. 노고단 산장에서 휴식을 취한 후 11시 임걸영을 향해 능선길을 걸었다. 해발 1751m의 반야봉이 손에 닿을 듯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임걸영을 향해 내려오는데, 300m 쯤 못미쳐 피아골 삼거리 표지판이 있었다. 이때가 12시. 마침 피아골로 가는 남녀 한쌍의 동행을 만났다. 서둘러 점심 식사를 마치고 1시에 피아골 계곡으로 접어들었다. 하산길임에도 바위, 돌로 된 길이 험하고 매우 지루하였다. 이 길을 허덕이며 올라오는 등산객들을 격려하며 내려가기를 한참. 오른편으로 꺾어 들며 잔등산을 넘어서니 맑은 계곡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계곡 물에서 세수를 하고 땀을 식혔다.

여기서부터는 계곡을 왼편에 두고 끝없는 돌길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계곡의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피로를 덜어주었다. 임걸영에서부터 족히 6km는 걸었으리라. 피아골의 평평한 마당이 나왔다. 유명한 삼홍소(三紅沼: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도 붉게 보인다는 못)를 지나 쇠줄 출렁다리를 건넜다.

 

꼿꼿하게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있는 목련 숲이 눈길을 끌었다. 목련이라면 그저 보통의 꽃나무로만 알았던 나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조금 더 내려오니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반. 내일 아침 일찍 구례로 가서 계획대로 9시 50분발 서울행 열차를 타기로 하고 깨끗해 보이는 집에다 민박을 정하였다.

힘들고 지루한 산행도 끝에는 탄탄대로와 편안한 휴식처가 기다리고 있기에 해볼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노고단 등정에 4시간, 피아골 계곡으로 하산하는 데 6시간 반 걸렸으니 24km의 험한 산길을 11시간만에 주파한 셈이었다. 우리 자신도 놀랄 만큼 체력에 자신이 생기고 70이 넘은 나이임에도 건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Note

1] 박내옥, "山이 좋아 山에 오르네", 「아버지 박내옥의 팔십평생」,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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