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임오순

parks6263 2021. 1. 29. 13:22

임오순(林五淳, 1921 ~ 2013. 10. 7)은 박혁거세 왕 61세손 넷째집 박내옥의 손아래 동서이다.

1921년 정읍에서 출생하여 1943년 일본 추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5년 해방 당시에는 고향 정읍농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9.28 수복 이후 10년간 가까운 친척인 임대홍 사장이 창업한 미원회사의 영업부장으로 일했다. 근면 성실한 덕에 일찍이 사업기회를 포착하고 1962년 서울 중구 방산시장에 일신상회를 차리고 미원 조미료와 미원 계열사에서 생산하는 포장용 비닐을 판매하기 시작했다.[1]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활발히 전개함에 따라 농촌에서 합성수지 필름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1967년부터는 동대문구 전농동의 100평 공장에 폴리에틸렌(PE) 압출성형기 4대를 설치하여 농업용 비닐을 생산하였다. 그 후로 일신화학공업사(日信化學工業社)라는 제조판매사의 체제를 갖추고 줄곧 합성수지 필름의 제조와 비닐하우스라고 일컫는 시설원예 영농의 혁신을 이룩하는 데 앞장섰다.

 

누가 보더라도 빈주먹 맨손으로 사업을 일으켰고[2] 아무도 엄두를 못내는 기술개발에 성공하여 국내 굴지의 농업용 비닐 제조판매 중견기업으로 일군 임오순은 자수성가형 입지전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1954년 5월 남원군수를 역임한 은치황의 차녀 은성남과 결혼하여 동욱, 장욱, 선형, 선희 2남 2녀를 두었다.

※ 이 글은 임오순 회장 별세 후 신문ㆍ잡지에 실린 추모기사와 일신화학 30년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힌다.[3]

 

기술개발ㆍ품질혁신 중심의 사업경영

도매상을 하다가 시장이 커질 것으로 보고 제조업에 진출한 경우 주력제품의 매출 확대에 노력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농촌 출신인 임오순에게는 취급하는 제품의 단점이 먼저 눈에 띄었다.

당시 생산 가능한 농업용 비닐 제품은 폭이 90cm, 120cm, 140cm, 160cm, 180m 정도였고 최대로 펼치면 360cm까지 나왔다. 그러니 비닐의 폭을 더 넓게 쓰려면 농민이 직접 셀로판을 깔고 인두로 이어붙여야 했다. 게다가 보온성이 떨어져 겨울철 해질 무렵이 되면 가마니나 짚을 엮어서 덮개를 만들어 하우스를 덮어 씌우고 아침 햇빛이 퍼질 무렵에 다시 덮개를 벗겨 주었다. 이 일만 해도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또한 수명이 길지 못해 가을에 비닐을 씌워 겨울을 나면 다음 해 봄에 새로 갈아 씌워야 여름을 넘길 수 있었다.

문제점을 파악한 임오순은 원재료를 수입해온 일본 업계에 수소문을 하고 관련 자료를 뒤져 일본의 미카도 화공이 관련기술을 확보한 것을 알았다. 미카도 화공의 이시모토(石本正一) 사장을 찾아가 삼고초려 끝에 그의 기술지도를 받아 1981년 마스터배치를 수입해 한국 농촌실정에 맞는 장수필름과 보온필름을 생산할 수 있었다. 사용법까지 가르쳐주는 적극적인 판촉활동과 대대적인 광고ㆍ선전으로 농가의 반응이 고조됨에 따라 3년이 못되 생산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1986년 미카도 화공이 장수필름과 보온필름의 장점을 따서 삼중필름을 개발하자 일신화학에서도 이를 생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에 필요한 삼중공압출기(三重共押出機, 3-layer co-extruder)를 수입해서 쓰지 않고 국내에서 제작하는 모험을 택했다. 국내 기계산업의 잠재력을 믿고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화기계에 의뢰한 것이다. 그 결과 1년 5개월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삼중공압출기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여 본격적으로 삼중보온필름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는 국내 시설원예 발전은 물론 한국의 플라스틱 가공기계 산업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지금은 보편화된 다중 복합필름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또 하나는 핵심원료인 마스터배치(master batch)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문제였다. 국내 원료회사인 한양화학이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여 국내 필름 가공업체에 공급하고 있었으나 품질 우선의 일신화학은 일본 미카도 화공에서 수입해 쓰고 있었다. 원료를 적기에 조달하고 운임과 관세부담 절감을 위해 1993년 미카도 화공과 합작으로 시화공단에 미림화학공업을 설립하고 장수 마스터배치와 보온 마스터배치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농업용 비닐 생산기술은 물론 원료조달의 독립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그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그동안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특히 농가의 수요를 포착하여 우리나라 기후조건에 맞는 신제품을 신속히 잇따라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삼중 EVA, 소무필름, 풍요필름, 지오놀라, 오래가 등의 신제품을 연속으로 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94년에는 방무형 무적제까지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수명이 4년 이상 오래가는 특수재질의 오래가 필름의 하우스 안에서 분무기로 이 무적제를 뿌려주기만 하면 물방울이 맺히지 않는 무적기능과 필름의 수명이 4년 이상 가는 내구성이 뛰어난 '오래가' 무적필름을 선보였다. 이는 인라인 코팅형 솔라리움의 개발로 이어져 농촌의 노동력 부족과 인건비 상승이라는 시설농업의 애로사항을 해소해주는 아주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그리하여 "학표 비니루를 모르면 농사꾼이 아니지"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국내 농업용 비닐 시장의 40%에 달하는 시장점유율을 확보하였다.

 

* 일본측 전문가와 학표 제품을 설치한 비닐하우스를 찾은 임오순 회장

 

숱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조미료와 합성수지 제품을 팔러다니던 영업사원이 제조업 기반의 중소기업을 창업한 후에는 숱한 시련과 역경을 헤쳐나가야 했다. 

기술개발의 어려움은 위에서 설명하였거니와 맨처음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어느 곳에 공장입지를 마련할 것인가 였다. 학표 비닐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생산시설의 확장을 고심하던 차에 목동 안양천변에 한국 플라스틱 수출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1971년 8월 공단에 1,160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공장과 기숙사, 식당을 짓고 그 이듬해에는 주식회사로 법인전환을 하는 한편 수출입업을 등록하고 직접 수출입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1974년 9월 태풍과 홍수로 안양천이 범람하고 한강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공장이 1층까지 물에 잠기는 큰 피해를 입었다.

공장을 이전하면서 남들이 하듯 다품종 소량생산을 한다고 이것저것 만들다보니 기계도 늘고 사람도 많이 필요했다. 회사의 고정비가 늘다보니 시장수요의 변화, 경쟁의 심화로 매출이 감소하는 경우에는 크게 결손이 나기 일쑤였다. 

 

이런 일이 겹치면서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들자 자연히 납세액도 줄었다. 평소 성실납세를 자부하고 있던 차에 세무서원이 찾아와 세금을 더내야 한다고 말했다는 보고를 받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나서 실적부진으로 노심초사하던 것이 그만 신경쇠약증[4]으로 번지고 말았다. 자세한 경위를 알아보니 세금을 추징한다는 말이 아니라 관할 세무서가 세수실적을 올리기 위해 차기 납세분을 미리 내달라는 말이 잘못 전달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한번 시작된 신경쇠약증이 심해져 자본과 경영실력을 갖춘 동업자가 절실히 필요해졌다. 마침 적임자를 구할 수 있어 그에게 회사의 지분 1/3을 양도하고 필요한 자본을 수혈받아 회사경영을 정상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 4월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동업관계를 해소하고 자본을 철수하는 것에 합의했다. 중소기업의 도약기에 자칫 실패할 수도 있는 파트너십을 원만하게 종료한 것은 파트너를 잘 만난 덕분이라고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 발전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다

올림픽 대로가 건설되고 목동 일대가 새롭게 개발됨에 따라 목동 부지를 팔고 반월공단에 5000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1989년 공장과 사무실을 모두 옮기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경영진을 보강하여 창업자가 2선으로 물러나더라도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로 했다.[5]

1993년 9월 주주총회를 열고 그 동안 회사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던 장남(임동욱)에게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권한을 대폭 넘겨주고, 국내 유수의 종합상사인 현대종합상사의 간부로서 해외 비즈니스 경험이 풍부한 맏사위(정철수)에게는 사장이라는 중책을 부여했다. 그리고 일신화학과 유대가 깊은 일본 아이세로 화학에서 장기연수를 마친 차남(임장욱)은 일본 미카도 화공과의 합작회사인 미림화학의 경영을 맡겼다.

국내 시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특약점과의 상생협력을 위해 특약점 주주제를 도입하는가 하면 공급유통망 확장을 위해 지방과 해외 여러 곳에 현지 공장을 세웠다. 

 

1998년 말에 문을 연 현대아산의 금강산관광단지에 4계절 야채를 공급하기 위해 현지에 조성된 비닐 하우스 단지가 일신화학에서 제공한 필름과 자재로 운영되었던 것도 특기할 만하다. 북한 주민들한테는 비닐하우스 영농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2001년 1천만달러 수출탑을 수상한 일신화학은 2015년 5월 청와대에서 열린 중소기업인대회에서 임동욱 대표이사가 대통령으로부터 금탑(金塔) 산업훈장을 받았다. 일신화학은 매출증가에 따른 외형 확대로 2016년부터는 중소기업을 졸업하게 되어 48년간 중소기업으로서 시설원예산업을 본궤도에 올리고 농촌경제를 크게 발전시킨 공적을 인정받은 것이다. 

 

* 일신화학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사진 왼편에서 두번째 임동욱 회장, 세번째 정철수 사장

 

창업자의 고귀한 기업가정신을 승계

다음은 회사의 홈페이지에 실린 임동욱 대표이사 회장의 인사말이다.

 

창업자이신 임오순 명예회장님의 고귀한 기업가정신을 이어받아 임직원이 합력하여 더욱 훌륭한 회사를 만들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1967년 전농동에서 사출기계 몇 대 놓고 출범한 일신화학은 농민의 기업으로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과 더불어 그 선봉에서 백색혁명을 이끌며 오늘까지 성장해 온 회사입니다. 물론 각종 포장산업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4계절이 뚜렷하며 국토가 비좁은 우리나라 작물 재배 환경에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영농기법은 우리농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며 세계 어느 나라도 이제 하우스와 멀칭 필름이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단일 공장으로 동양 최대 설비를 자랑하는 저희 농업용 필름의 학표 제품은 국내는 물론이요 중국에서도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아 이미 최고의 제품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또한, 급변하는 기업환경 속에서 다양한 산업용 제품들이 개발 되어왔으며 세계 최고 수준인 국내 IT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수입에 전량 의지하던 첨단 광학용, 전자재료용 특수 보호필름의 개발이 요구되었습니다.

일신화학이 아낌없는 투자비와 3년여의 피나는 개발 노력을 들여 세계 2~3번째로 제품개발에 성공한 클린 로우겔(lowgel) 필름은 국내 전자 회사들을 깜짝 놀라게 한 40년 일신화학의 기술이 집약된 제품으로 국내는 물론이요 세계 시장으로 그 판매 영역을 넓혀갈 것입니다.

고객 여러분, 저희 일신화학은 고객의 니즈(needs)에 신속히 부응하며 이웃과 지역사회에 사랑을 펼쳐가는 좋은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노력 하겠습니다.

 

Note

1] 임오순은 1962년 41세의 나이로 미원에서 나와 서울 방산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할 때 오직 信用과 信義 하나를 밑천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고 신용과 신의를 빼어버리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一信商會라는 상호를 정했다. 1년후에는 一信비니루商社로 상호를 바꾸어 전에 근무했던 미원과, 미원에 포장용 비닐을 납품하던 영진화학과의 경합을 피해 비닐제품을 전문으로 취급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려 애썼다. 그런데 영진화학의 임채홍 사장이 임오순을 찾아와 불량채권이 속출하는 것을 염려하고 대전 이북지역의 비닐 총판을 제의하여 기꺼이 수락하고 판로개척에 힘썼다. 나중에 제조업 법인으로 전환할 때에는 하루하루 그 정신을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日信화학공업(주)로 발음은 같되 한 글자만 다른 상호를 등록하였다.

 

2] 임오순이 미원에서 독립하여 합성수지 비닐제품을 주로 취급하는 장사를 시작할 때 정말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친척뻘인 영진화학의 임채홍 사장과 돈계산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살고 있는 집 전세금 등을 담보로 제공하고 해당 금액만큼만 외상거래를 하자고 제의했다.

 

3] 필자(박훤일)는 고인이 이모부라기보다 집안의 은인(恩人)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아버지(박내옥)가 실직하셨을 때 이제 막 제조업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선뜻 경리부장이라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나중에는 감사로 선임하여 정년이 될 때까지 다니시도록 했다. 게다가 처형이 내집마련에 고생한다는 말을 들으시고선 이모를 통해 거금을 빌려주셨다. 내가 서울대 입학시험을 볼 때에는 고등학교 입시 때 차편이 없어 고생했던 것을 아시고 이틀 연속 당신의 출근 승용차를 내어주셨다. 그리고 합격 소식을 들으신 후에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시며 나를 불러서 축하금을 주시기도 했다. 부담이 되는 일가친척을 경원시하는 세태에 이처럼 처가 식구들까지 챙겨주신 고인의 후덕한 인품은 아무나 따라하기 힘든 일이라 생각된다.

 

4]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고인은 1970년대 중반에 닥친 신경쇠약증도 그답게 극복하였다. 정신신경과 통원치료를 받는 한편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체조, 아침산책과 주말등산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수유리, 방배동 같이 산과 숲 접근성이 좋은 곳에 집을 마련하고 5시에는 뒷산에 올라 한 시간 이상 운동을 하였다. 또한 주말이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등산을 하고 동행한 사람들과 격의없는 담소를 즐겼다. 내핍과 절약이 체질화되었음에도 가족 건강을 위해 먹는 것은 아끼지 않았으며, 부득이한 손님접대 이외에는 반드시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5] 창업자로서 특별히 신경을 쓴 것이 일신화학의 기업문화였다. 창업자의 생활철학 그대로 '근면', '성실', '정직'과 '인화'의 바탕 위에 사원과 고락을 같이 하면서 기업과 사원이 같이 발전한다는 기업정신을 줄곧 강조했다. 반월공단으로 이전한 후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회사에도 노조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창업자는 사원들 개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보람과 긍지를 갖는 주체가 되도록 기업의 환경과 후생복지 증진을 도모하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신화학의 가족정신은 1989년에 새로 제정된 사가(社歌)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해가 뜬다 반짝인다 앞서 나가자/ 우리는 자랑스런 일신의 가족/ 온누리에 펼쳐보자 우리의 솜씨/ 서로 돕고 사랑하는 마음도 하나/(후렴) 오늘의 땀방울 빛나는 내일/ 일신가족 한마음 꿈을 키우자."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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