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신용우

parks6263 2020. 8. 15. 19:00

고령 신씨 신용우 (申庸雨, 1912∼1989.12. 4) 님은 넷째집 4남 박훤일의 장인이다. 박내옥 (1912-1996)과 같은 임자(壬子)생으로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는 삶을 사셨다.

두 분 모두 일제강점기 전라도의 벽촌(승주군 쌍암면 : 남원군 운봉면)에서 태어나 가업인 농사를 지어야 하는 숙명을 벗어던지고 신식 교육을 받았다. 형제가 많았고 현모양처형 아내를 만나 많은 자녀(둘 다 4남 5녀)를 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후자(박내옥 님)가 여러 차례의 난관을 헤쳐나오면서 순응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전자(신용우 님)는 난관을 극복할 때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한 단계씩 상승하는 삶을 개척하였다.

운봉 박씨 집안의 사돈이자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도지사를 역임하였고 특히 외손인 박영진과 박영철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신용우 님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한다.[1]

⇒ 중앙일보 "성씨의 고향" (1983.09.17)에 실린 고령 신씨에 관한 기사는 이 곳을 클릭.

 

소년 시절

인간의 수명은 장단(長短)이 정해 있는 게 아니고, 그 한 평생 사는 것도 모두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내 스스로 돌이켜 볼 때 전라도의 낙지벽촌(落地僻村)에서 태어나 아무런 재력도 권력도 배경도 없이 평지에 돌출한 바위 같은 삶을 살았다.

그 조짐은 어머니의 태몽에서 비롯되었다. "높은 벼슬아치가 일산(日傘)을 쓰고 큰 행렬을 지어 집에 들어는 꿈"을 꾸신 후 태어난 장남에게 큰 기대를 품고 생후 7주간 새벽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어려운 농촌 살림에 큰댁의 한문서당에서 한문 공부하는 것으로 끝날 뻔하였으나 조부님을 비롯한 가족회의에서 순천으로 유학을 보내 공립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살 어린이가 장발을 했던 머리를 깎고 집에서 20km 떨어진 순천에서 하숙을 하며 신식학문을 배웠다. 실로 쌍암면 최초의 기록이었다. 6년 후 상급학교 갈 사람은 지원하라고 하여 당시의 선망의 대상이던 학교 선생님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더니 광주에 있는 3년제 도립 사범학교에 시험을 치라 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6학년의 실력으로 어떻게 도립 사범을 갈 수 있겠느냐는 핀잔도 들었으나, 시험 전날 240리 길을 걸어 광주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그 결과는 '합격'이어서 고향 사람들이나 모교의 선생님들이 모두 놀랍다며 환성을 질렀다.

 

고등고시 도전기

광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원생활을 6년 가까이 할 즈음 이웃 마을인 광양군 진상면에서 엄상섭이란 분이 일제 고등문관(高等文官)시험에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 갔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배의 심경은 잘 알았소. 결심은 자기가 하는 것이니 결심이 확고부동하다면 당장 도쿄로 가시오. 하루가 빠르면 합격도 그만큼 빨라지는 것이요."

당시 나는 조광순 (趙光順, 1915~2009. 4.13)과 혼인하여 3남매를 두고 있었다.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 나의 계획을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곧바로 학교에 사표를 내고 처자 4명은 살림이 어려운 양친에게 맡기고 학비는 3년만 종형에게 후원해 달라 부탁해 놓고서 일본으로 떠났다. 고향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하늘의 별을 따러 가는 사람"이라고 수근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모험이었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도쿄에서 일단 닙폰대학(日本大學)에 적을 두고 초년도에는 영어공부와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과 고등고시 예비시험 준비를 몰두하였다. 다행히 1년만에 모두 합격하여 닙폰대학 본과생으로서 본격적인 고등시험 준비에 돌입하였다.

학교는 공납금만 바치고 도서관과 연구실, 하숙방을 쳇바퀴 돌 듯 다니며 법률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고등시험 사법과와 행정과에 응시하였으나 행정과만 합격하여 그런 대로 대망(大望)을 이루었다. 그 후 공부를 계속하여 닙폰대학 46개 과목의 시험을 모두 패스하고 우등상과 함께 전문부 법률과의 졸업장을 받아 쥐었다.

그 때까지 나처럼 3년 만에 그 어렵고 힘든 과정을 마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3년 밤잠 안 자고 공부한 결과 산 송장 같은 몰골이 되었고,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해 보니 처자의 행색도 말이 아니었다.

 

6․25 고난의 시절

귀국 후 조선총독부의 인물전형을 거쳐 처음 배치받은 곳이 충남 부여군 학사계장 자리였다. 해방 후에는 미 군정 하에서 충남도청 학무과장, 후생과장을 역임한 후 고향인 쌍암면장을 자진하여 봉직했고 보성군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 때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 그 뒷처리로 죽을 고생을 하다가 내무부 지방국 행정과 기획계장으로 영전하였다.

 

6.25 사변을 맞은 것은 38세 되던 해 강원도 산업국장 시절이었다. 6월 24일 토요일 서울 명륜동 집에 와 있었는데 25일 새벽 전쟁이 난 것을 알았고 행낭을 꾸려 피난길에 나섰다가 한강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길을 단념하였다. 식구들이 떡장사, 담배장사, 야채장사를 하여 연명을 하였으나, 나는 마루밑에 숨어 지낼 수 없어 사람 눈을 피해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살 수 있는 방안은 부역(공산당에 협력)을 하거나 의용군에 들어가는 길 뿐이었다. 관용차 운전기사의 형이 살고 있다는 양주군 무시울이란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1주일 만에 그 동리의 무장 청년들에게 붙잡힌 몸이 되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우리를 소나무 밭으로 끌고 가더니 한 줄로 묶고 돌아 앉으라 했다. 총살집행을 할 모양이었다. 죽기 살기로 호통을 치며 물었다.

"여보시오. 당신네 법은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이요? 왜 죽이는지 알려는 줘야 할 것 아니요?"

그랬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이 새끼, 고관(高官) 해 먹었지"하고 묻기에 나의 정체를 모르고 있구나 싶어 따지고 들었다.

"사람 잘 못 보았소. 나는 고관을 한 적이 없으니 고관 아닌 사람을 고관이라고 몰아 죽이는 법은 없소. 나는 국민학교 교장을 한 것뿐이니 정식 재판을 받게 해주시오."

내 말이 먹혀 들어 그 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처형을 면하고 현 서울농협 자리에 있는 서울시 검찰청으로 이송되었다.

 

결국 인민공화국 형법 제77조 해당자라 하여 인민재판에 붙여 총살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 갔으나 빈 방이 없어서 중부경찰서 지하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이 곳에서 강도 6, 7범들과 함께 지내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들고나는 피의자와 죄수들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9월 25일 낮 유엔군 포성이 가까이 들리는 가운데 인민군은 유치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따발총을 쏘아댄 후 사라져 버렸다. 한참 후에 동네 사람들이 들어와 먹을 것을 주고 옥문을 도끼로 부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을 꺼내 주었다. 바깥의 중구와 종로 시가지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청계천 하수도를 십리 이상 걸어 가까스로 창경원을 지나 무사히 귀가하였다. 식구들은 거지가 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한 사람도 희생 없이 재회할 수 있었다.

 

내무부 지방국 시절

정부 환도 후 부역자(附逆者), 도강파(渡江派), 비도강파(非渡江派)로 분류하는 등 시끄러웠음에도 나는 내무부 지방국 지도과장으로 근무하였다. 2, 3개월 후 전선(戰線)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식구를 반으로 나누어 그 절반을 우선 고향 집에 데려다 놓기 위해 남보다 먼저 뛰었다. 고향에 가보니 종형과 몇 사람이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기 직전이었다. 광주, 목포로 돌아다니면서 가까스로 구명에 성공하니 서울이 다시 인민군에게 점령 당하고 말았다.

서울에 절반 남은 식구가 걱정이 되었으나 도저히 적군의 점령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피난민 수용소를 찾아 헤매고 다니다가 요행히 그 안에서 피난해 온 식구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온 식구가 부산에서 3년간 피난살이를 했다. 그 때 처갓집의 외아들인 처남이 담양 산 속에 피신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담양경찰서장에게 부탁하여 무사히 구출하였다.

 

전쟁 통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으나 이는 나만이 겪은 일이 아니었고 근친 중에 한 사람도 희생 당한 사람이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 다복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내무부 지방국에서 6,7년 근무하는 동안 40대 인생의 꽃에 해당하는 시기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전쟁 중 기획계장을 할 때에는 지방자치법, 지방재정법의 입법과정에 참여하였고, 지도과장 시절에는 대통령선거, 민의원선거, 지방의원 선거를 무사히 치루었고, 행정과장을 하는 동안에는 자치행정의 육성과 감독을 총괄하였다.

이 시기에 수행한 일은 내무부[2]에서 발간하는 [지방행정]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3] 내무부 지방국에서 중견공무원으로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고, 이는 내무부 고위관료로서, 도지사로서 활약할 때에도 든든한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공직 생활

내무관료로서 실무에 종사하면서도 이론체계를 세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아 「지방재정법」이라는 스테디 셀러를 저술하기도 했다.[4]

전라북도 지사 (1955-56)를 역임한 후 서울시 부시장 (1956-59)을 지냈고, 제3대 전매청장 재직(1960-61) 시에는 처음으로 기업회계원칙을 도입하여 공기업의 경영합리화에도 앞장섰다.

5.16 후 민정이양 당시 전라남도 지사 (1963-66)로 기용되어 전라남도의 근대화에 역점을 둔 도정을 펼쳤다. 전라남도 지사를 퇴임하자 남도의 유림(儒林)들이 성금을 갹출하여 1966년 5월 광주공원에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주었다.[5]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전남의 발전과 민심계몽, 유교정신의 앙양에 노력한 것이 도민들의 정성을 모으게 하지 않았나 싶다.

공직을 물러난 후에는 1967년 전라남도에 조성된 여수 공업단지의 핵심이었던 신설 민간정유회사 호남정유(현 GS칼텍스) 이사를 거쳐 1968년 호남전력주식회사 사장으로 발탁되었다. 1971년부터는 서울에서 변호사로서 활동하면서 전남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Note

1] 신용우, [나의 회고(回顧)], 1971. 6.

2] 내무부는 1998년 총무처와 통합되어 행정자치부가 되었고, 그 후 행정안전부, 안전행정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지금은 다시 행정안전부라고 부른다.

 

3] [지방행정]지에 실린 필자의 논설 목록은 다음과 같다: "지방선거의 실시를 마치고" (1952.7 창간호); "선거공영의 소리 해부" (1952.9); "국가기관인 시읍면장에 대한 감독" (1952.10); "자치법 제105조 공공단체의 감독론 소고" (1952. 11-12); "전시행정(戰時行政) 잡감(雜感)" (1953.5); "지방의원의 소리 상고" (1953.7); "시읍면장 선거에 나타난 두 가지 문제" (1953.12); "시읍면장 경질에 대한 고찰" (1954.1); "군청 위치결정에 대한 시비" (1954.4); "강력하고 통일된 지방핸정 실현에 노력"(지방국장 취임사, 1954.9); "수복지구에 대한 행정수습" (1954.10) 등.

 

4] 서재를 가득 채웠던 지방행정과 법학 도서는 그의 사후 장남인 신대식이 전남대학교 법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5] 선정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전라남도 향교재단의 이석근 이사장을 필두로 각군의 유림 대표가 모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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