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집안 이야기

아버지의 초상 (박훤일)

parks6263 2020. 8. 15. 16:00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훤일 (朴烜日, 1953 -  )은 박내옥-은성덕의 4남으로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 전주북중학교[1]를 다녔고, 서울 대광고등학교[2]를 마치고 1971년 곧바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으며, 몇 차례 사법시험에 고배를 든 후 1977년 말 한국산업은행에 들어갔다.

은행에서는 주로 국제금융부와 조사부에서 근무하였는데 88 올림픽 직후 3년간 미국 뉴욕에서 주재원 근무를 하였다. 1986년 네덜란드 정부의 펠로우십을 받아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유럽통합과정(ICEI)을 공부하고, 다시 1993년 미국 댈러스 소재 서던메쏘디스트대학(SMU) 로스쿨에 유학하였다.

 

1996년 봄부터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야간)에서 매학기 국제거래법을 강의하다가 2000년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경희대 법대에서 상법, 국제거래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은행 법무팀장 때의 경험을 살려 IT 기반의 동산담보관리 및 체제전환국에의 적용에 대해 줄곧 연구를 하였으며 관련 특허를 다수 등록하였다.
그 밖에도 IT와 관련된 개인정보보호 및 전자상거래의 연구, 15년 이상의 홈페이지 운영, 인터넷을 이용한 한국법의 전파 (Korean Law via the Internet, KoreanLII)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다음은 1992년 부친의 팔순을 기념하여 간행한 [아버지 朴萊玉의 팔십평생]에 수록된 소감문이다.

 

* 팔순문집 표지에 직접 그려넣은 아버지의 초상화

아버지의 초상 (肖像)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을 때는 이미 마흔을 넘기셨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젊고 패기에 찬 아버지의 모습이 전혀 기억에 없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생활에 찌들고 지치신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현실은 그와 반대로 아버지가 막내 아들을 위해 걱정을 많이 하시도록 했다.

 

나는 어렸을 때 몸이 약하여 부모님께 적잖은 걱정을 끼쳐드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홍역을 앓은 뒤로 빈혈이 심하여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한약방에 다니던 기억이 난다. 또 방학때면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숙제를 안하였지만 아버지는 으례 "우리 아이는 몸이 약하여 숙제를 시키지 않았으니 양해해 주십시오"하고 담임 선생한테 편지를 써주시곤 하였다. 시험 때면 그 당시만 해도 귀하였던 계란을 몇 개씩 사오셨는데 그것은 오직 내 차지였다. 아버지는 늙으막에 얻은 막내아들을 끔찍이도 위해 주셨던 것이다.

 

어사화(御賜花) 꽂은 아들

내가 학교 다닐 때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버지께 좋은 성적표를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주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서울의 일류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3년 후 대학에는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는데, 나는 아직껏 그날을 잊지 못한다. 합격 소식을 들으시고 퇴근하신 아버지는 마당에 나를 세워놓으시더니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서울 법대 합격, 만세"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처음엔 자랑스럽기보다 창피한 느낌이 들기도 했으나 아버지가 왜 목청이 터져라 외치시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御賜花 꽂은 장한 아들[3]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에 그토록 오래 집착하였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역시 국책은행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음에도 고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들이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나는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미루고 있었는데 1983년 1월 1일 세배를 올리는 나를 붙잡고 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다.

"남자 나이 서른은 환갑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금년은 넘기지 말고 결혼을 하도록 해라."

 

결혼 문제를 놓고 아버지와 대립할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나 역시 사시 합격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었으므로 닥치는 대로 선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결혼에 초연하던 모습에서 180도 바뀌어 나는 쫒기는 심정으로 결혼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 해 8월에 직장 동료(최종범 성균관대 교수)의 소개로 만난 아가씨(申昭姬)는 나와 똑같은 4남 5녀의 여덟째이고 전남 지사를 역임하신 장인될 분(申庸雨)은 아버지와 壬子생 동갑이셨기에 첫 만남에서 우리 식구와 매우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노총각으로서 더 이상 따질 것 없이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나는 아들 막내로서 별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경제문제로 늘 걱정하시는 것을 보아왔기에 경제적 자립에 대해 일찍 눈을 떴다고 생각된다. 1975년 아버지가 정년 퇴직을 하시는 마당에 대학을 졸업한 후 무작정 고시공부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시에 연전 연패하자 나는 취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 산업은행에 다니는 고등학교-대학교 선배로부터 "은행 다니면서도 고시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977년 가을 나는 주저 없이 산업은행에 입행원서를 제출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내린 결단은 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사법시험 합격자가 80명에서 300명으로 늘어나 시험 준비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을 안타깝게 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아버지는 퇴직을 하셨고 막내 동생은 대학에 입학한 뒤였다. 그러므로 나는 은행에 열심히 다니는 한편 동생의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였고 동생이 졸업할 때까지 용돈을 책임지기로 했다.

 

효도(孝道) 관광

이모부가 경영하는 회사(일신화학)를 그만 두신 뒤로 아버지는 주로 등산을 다니시며 소일하셨다. 그동안 자식 키우느라 못하신 당신만의 취미 생활을 비로소 시작하신 셈이었다. 마침 우리 직장에서는 여름 휴가철에 동해안에 연성장을 만들어 희망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1978년 입행후 첫 여름 휴가 때 내 차례가 아님에도 부모님을 모시고 간다는 점을 강조하여 티켓을 따냈다. 전주에서 가까운 변산이나 여수 등지의 해수욕장에 가보신 부모님으로서는 그것이 생전 처음의 동해안에서의 해수욕이었다.

망상의 바닷물은 맑고 깨끗하였다. 두타산의 무릉계곡도 그 이름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당시 카메라가 없어 사진을 찍진 못하였지만 용추 폭포에서 목욕을 하면서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 망막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래서 1980년엔 휴가를 앞당겨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부모님이 그때까지 비행기, 카페리, 새마을호를 타보시지 못한 것을 감안하여 내가 직접 다채롭게 일정을 짰다. 1972년 아버지 환갑 때에도 두 분이 부산과 남해안 여행을 떠나셨으나 별로 재미가 없었다는 어머니의 푸념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시면서 마치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에 나는 전혀 피로한 줄 몰랐다. 제주-부산간 페리 선상에서는 남해 바다 위의 저녁놀을 감상하였으며, 부산 관광을 마친 다음 경주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불국사와 새롭게 단장한 보문단지를 구경시켜 드렸다. 그리고 서울까지는 새마을호로 모시고 올라왔으니 그 당시의 온갖 교통수단을 최고급으로 모신 셈이었다.

 

미국 여행

국제수지 사정이 호전된 1980년대 중반부터는 우리나라에도 해외여행 붐이 일었다. 집안에서도 해외여행을 떠나는 분이 있었으므로 형제들과 힘을 합하여 부모님께 일본 관광을 시켜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1940년대 초에 일본 여행을 하신 적이 있었으니 매우 뜻깊은 여행이 되실 터였다. 나는 암스테르담 대학원에서 유럽 통합을 공부하였기에 해외 근무지로서는 런던이나 프랑크푸르트가 적합할 터였지만, 내심으론 도쿄를 희망하고 있었다. 양가(兩家)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언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몇 시간 안에 달려올 수 있는 동경이 아니면 곤란할 것 같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발령이 났는데 나의 임지는 도쿄가 아니라 뜻밖에도 뉴욕이었다. 뉴욕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따지고 보면 LA에는 셋째 형과 넷째 누나가 이민 가서 살고 있었으므로 나쁠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부모님의 근력이 좋으실 때 미국에 모시기로 하고 집사람이 출국수속을 밟을 때 부모님의 여권까지 만들어 드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9년 4월 부모님이 미국 땅을 밟으셨다. LA 형님, 누님 댁에서 보름 계시다가 5월 7일 뉴욕에 오셨다. 내 마음 같아서는 여러 군데 모시고 다니고 싶었으나, 우선 어머니가 자동차를 1시간 이상 타면 몹시 힘들어 하셨으므로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곳은 처음부터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 1989년 미국을 방문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의 전적지 웨스트포인트를 찾아갔다.

맨해튼에서는 센트럴 파크에서 마차를 타고 하는 드라이브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올라가신 것이 고작이었지만 뉴욕 시내관광도 시켜 드리고, 뉴저지주 우리 사는 주변의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와 베어 마운틴, 자유의 여신상 뒷모습이 가깝게 보이는 리버티 스테이트 파크, 포트 리 역사공원, 밴손 파크 동물원 등지로 모시고 다녔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사촌 형집에 모시고 갈까 하다가 도중의 그레이트 어드벤쳐에서 사파리도 하고 온갖 탈 것을 태워 드렸다. 그때 77세이신 아버지가 롤러코스터(청룡열차)를 타겠다고 하셔서 만류하느라 혼난 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부모님은 뉴욕 우리집에 3주 동안 머물러 계시다가 다시 LA로 가셨다. LA 형님이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하여 꼭 들러가시도록 했기 때문이다. 연로하심에도 두분이 건강하게 미국 여행을 다니신 것은 좋았으나 내가 뉴욕에 부임한지 일천하여 1시간 정도 차를 몰고 가면 볼 만한 곳이 여기저기 많았음에도 다 보여 드리지 못한 점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아버지의 초상

1992년 금년에 아버지는 팔순을 맞으셨지만 나도 마흔 살이 되었다. 사실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와 나의 연령 차이는 항상 내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아버지의 기력이 많이 쇠하셨다 해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하고 전혀 차이가 없다. 주름살이 늘고 허리가 굽으셨어도 내가 어렸을 때 한약방에 데리고 다니시던 아버지의 인자한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를 향하는 마음은 윤리·규범에 입각한 효(孝)의 관념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보고 배운 대로 우리 집안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생활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재산을 거의 물려주지 않으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성심을 다하여 섬기셨으며, 할아버지 대신 학비를 대주신 큰아버지들에게 늘 감사의 정을 표하시곤 했다. 50년대 전주의 우리집은 수많은 아버지 조카들의 하숙집(쌀값을 내든 내지 않든)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받들고자 한 것도 1960년대와 70년대에 어려운 가계를 꾸려나가시는 어머니한테 월급의 태반을 갖다드린 작은형님이나 둘째누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 역시 취직한 뒤로 누이동생의 용돈을 댔다고 하지만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용돈을 주셨던 작은형님의 은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아버지의 모습이 극노인으로 바뀌고 있음을 본다. 그래도 지금이 더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버지가 나를 낳으실 때의 그 나이에 내가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몇십년후 나의 자화상(自畵像)을 보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Note

1] 전주북중 48회 동기 중에서 정동영, 신경민, 고도원, 김명곤 등 유명 인사와 장관이 여러 명 배출되었다.

2] 대광고 23회 동기 중 유명 인사로는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장성구 경희의료원장/대한의학회 회장, 김용민 포항공대 총장, 차광렬 차병원 이사장 등이 있다.

3] 어머니가 결혼 초에 당사주를 보았더니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아들과 어사화를 꽂은 아들을 둔다는 점궤가 나왔다고 한다. 부모님은 평생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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