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집안 이야기

박훤용

parks6263 2020. 8. 15. 15:40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훤용 (朴烜庸, 1939.8.5 ∼    )은 넷째집 박내옥-은성덕의 차남이다.

1939년 남원에서 태어나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녔다.
1961년 학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1963년 중소기업은행에 들어가 계리과장을 역임한 후 공인회계사(CPA) 개업을 하였다.

1971년 전남 해남 출신의 사업가 김공칠(金公七)의 3녀 김미자(金尾子)와 결혼하여 정윤, 정민, 선민 세 딸을 두었다.

 

훤용 형님의 고희연

다음은 2008년 7월 26일 서울 COEX Asem Hall에서 열린 박훤용 형님의 고희연에서 필자가 하객들에게 소개한 오늘의 주인공에 얽힌 에피소드이다.

아래 사진에서 한복 입고 앉아 있는 부부가 이날의 주인공 부부이고, 그 가운데 앉아 있는 두 분은 태용 형님 내외, 나머지는 모두 박내옥-은성덕 님의 자손들이다.

여기서 고희(古稀)란 '인간칠십고래희'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은 일흔살을 넘기는 일이 드물다"는 의미였으나, 수명이 크게 연장된 오늘날에는 칠순을 기념하는 잔치를 환갑잔치 대신 많이 하고 있다.[1]

 

 

이삭을 닮은 사람

형님 고희연에서 대표기도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성경책을 뒤적거리다가 훤용 형님의 생애가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조상인 이삭과 많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창세기 26:19-33).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으로 얻은 자식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성격이 매우 온순하였다고 합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짓고 양과 소를 키울 때의 일입니다.

그 일대는 모두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라서 이삭이 우물을 파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차지하고, 다시 이삭이 옮겨가 우물을 파면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곤 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물이 잘 나오는 우물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우물을 지키기 위해 이웃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았습니다. 우물을 거저 내주고 자리를 피했지요.

이삭이 우물을 파고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여호와가 이삭과 함께 하심을 알았으니 그들이 여호와로부터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의 대표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 서로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우리 형님도 누구와 크게 싸우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쩔 때는 제가 되레 화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다 사기꾼 같은데 따져보지도 않고 그 말을 다 믿느냐.
그들이 모두 우리 가족의 일원이었기에 형님의 너그러운 마음은 결국 선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우리 형님이셨던 것입니다.

 

집안의 노적가리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형님이 월급날이면 신권으로 용돈을 주신 것을 지금도 여러 장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때 형님은 집에 돌아오면 호주머니에 있는 모든 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이면 동전 몇 닢은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있었지요. 그 돈을 누가 가져간다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즐거이 그 습관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둘째아들이 가을 "추수벌판의 큰 노적가리"와 같다고 하시면서 그 주변에 떨어진 이삭만 주워도 집안이 평안하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월급쟁이를 하셨기에 작은 형님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형님은 아무 불평도 아니 하시고 집을 옮길 때면 큰 돈을 보태고 동생들 용돈과 학비를 대주시곤 하였습니다.

저는 다행히 막내아들로 태어나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고 혜택만 보는 입장이었는데 우리 형님은 한 번도 동생들에게 공치사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과 늘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 주님이 형님과 늘 함께 하셔서 복락을 누리게 되실 것을 믿습니다.

 

초인적인 인내심

끝으로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총각 시절에 대구에서 기업은행에 다니면서 하숙생활을 하실 때의 일입니다.
배가 아픈데 고기를 먹고 채한 줄로만 알고 혼자 참고 계셨습니다. 급기야 맹장이 터져서 수술을 해야 했으므로 급히 어머니가 대구로 가셨습니다.

기업은행 직원들이나 하숙집 사람들이 그렇게 참을성 많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성격을 닮은 사람이 그 딸 중에 또 있다는 것입니다. 2007년 가을 둘째딸 박정민이 맹장이 터진 줄 모르고 한 달 가까이 버티다 입원한 적이 있었지요.

우리가 본받을 점은 목표를 한 번 정하면 열심히 노력하여 끝내 성취하신 일들입니다.
시험을 보았다 하면 합격하셨고, 웅변과 테니스, 춤과 노래 모두 노력하여 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신 것을 저는 기억합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아낌없는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남은 여생도 자녀 중에 잇따른 경사를 보시고 부부간에 화락하시면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막내 외손녀 첫돌기념 가족사진

다음은 2014년 2월 셋째 선민이의 단혜 첫돌맞이 기념사진이다.

위의 고희연(2008.7.26) 사진과 아래의 첫돌기념(2014.2.23) 사진은 5년 반의 시간 간격이 있다.

 

 

Note

1] 박훤일, "훤용 형님의 고희연", 국제거래법포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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