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집안 이야기

청첩편지 (박규홍)

parks6263 2020. 8. 15. 17:00

박혁거세 왕 61세손 박규홍 (朴圭烘) 님은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에서 1923년 1월 27일 태어나 1979년 1월 29일 세상을 떠나셨다.

머리 좋고 향학열에 불탔던 님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도일 유학하여 추오대(中央大) 상학과에서 공부하던 중 태평양 전쟁에 징집되었다. 그러나 본토 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조국 광복을 맞았으나 현지 사정으로 귀국이 다소 지체되었다.

 

귀국 후에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관재처에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 입대하셨다. 해병대 경리장교로서 종전을 맞은 후에는 일본 파견 상무관 시험에 합격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상공부에 들어가셨다. 중소기업과장을 거쳐 1968년에는 초대 중소기업국장에 취임하셨다. 그 후 상공부 특허국 특허심판관으로 일하다가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로 옮기셨다. 당시 오일머니로 신흥 수출시장으로 부상한 중동지역 담당이사로서 카이로, 베이루트, 요르단의 암만에서 활약하셨다. 1979년 초 회의참석 차 일시 귀국하였다가 과로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하셨다.

 

면 모

6남 3녀 9남매 중 가장 인물 좋고 두뇌가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장래가 촉망되었다. 사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뛰어난 분이었고 조금도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모친인 안동 김씨는 사지(死地)에서 생환(生還)하는 아들이 이제나저제나 올까 하고 운봉에서 남원으로 나오셔서 역전에 앉아 막내아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셨다고 한다.

 

지인의 소개로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를 마치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한광순(韓光順) 선생을 만나 1949년 11월 21일 덕수궁에서 조소앙(趙素昻) 선생[1]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훤철(미국 미네소타주), 혜영, 훤겸, 은영 등 2남 2녀를 두었다.
큰며느리는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IGM) 회장의 동생 전성혜이고, 차남은 간이식 전문의인 한양대 구로병원 박훤겸 외과과장이며 작은며느리는 서울의대 건강검진센터 이은희 진료교수이다.

장녀 박혜영은 파리 제4(소르본)대학에서 불문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고 덕성여대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취직과 결혼식을 알리는 편지

다음은 1949년 서울 중앙관재처에 취직한 소식과 함께 결혼식 날짜를 잡고 운봉 맏형님께 저간의 사정을 알리는 편지글이다.2] 이 편지만 보더라도 자상한 성격에 명문 달필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력으로 결혼식을 준비하고 인생을 개척해 가려는 결연한 모습이 엿보인다.

 

 

백형(伯兄主) 전상서

중추가절도 이미 지나고 등화가친의 호시절에 농번기 추수절을 맞이하였나이다. 백형 기체후 만강하옵시고 형수께서도 강녕하시오며 을용 군도 잘 있는지요. 사제(舍弟)는 객지에서 잘 먹고 자고 여전히 잘 있아오니 다행이오이다.

다름아니오라 거식(擧式)일자가 11월 21일로 통고가 왔아온대 신부쪽 제반 사정도 있으므로 다소 한랭할 것이오나 이 날짜를 거부 내지 변동하여야 할 이유도 별로 없기에 그대로 정하는 것이 가할까 사료되옵니다. 거식 후 2-3일 경과한 후 약 1주일 예정으로 동반 귀성할 계획이온대 어떠할지요.

 

누님 보시옵소서

날짜가 작정되었습니다. 장가 들고 시집 가는 날짜가 났습니다. 좀 춥기는 하겠지만 11월 21일로 났어요.옷을 못 해주고 패물을 못 사주고 하드래도 집이 없고 살아갈 것이 걱정이라 해도 여기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서 일생을 해로할 것을 맹서하는 날이니 얼마나 신성하고 또 얼마나 기쁜 날이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님도 기뻐하여 주시겠지요. 저의 장래를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용기를 붇돋아 주시겠지요.

본래 인생이 고(苦)만도 아니고 락(樂)만도 아니라면 苦도 달갑게 받고 용감히 싸워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정도에는 한정이 없을 것이니 형편되는 대로 최선을 다할 따름이지요. 한 칸 셋방도 좋고 우거지찌개도 좋고 철에 맞지 않은 의복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식날은 제백사하시고 이 기회에 한 번 상경하셔서 저희의 새출발을 축복하여 주심을 간절히 비옵니다.

 

음 8월 19일(1949.10.10) 밤 규홍 올림

 

Note

1] 조소앙 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교육활동을 하다 1917년 중국에 망명, 임시정부에서 주로 외교분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조국 광복 후 귀국하여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8년 김 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도 참가하였으나 그 실패를 인정하였다. 1950년 서울 성북구에서 조병옥을 누르고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당시 북에 피랍되었다.

 

2] 수신인인 박주옥 님의 장남 섭용이 보관하고 있다가 2013년 신변을 정리하면서 편지의 원본은 해당 가정에, 사본은 필자에게 보내주셨다. 당시의 교통 및 취업 등 사회상과 집안 형편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여기 게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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