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집안 이야기

홍난파 (박호현)

parks6263 2020. 8. 15. 13:40

운봉 박씨와 사돈을 맺은 집안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적지 않다.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호현 (朴皓炫, 1932.10.20 ~  ) 의 장인 난파 홍영후 (蘭坡 洪永厚, 1898 ~ 1941)도 그 중의 한 분이다.

유난히 폭염이 심했던 2013년 여름 난파 음악상 수상거부 소동이 벌어졌다.[1] 수상 예정자였던 음악인들의 올곧고 외곬수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옥고를 치르고 그때 얻은 병마로 일찍 세상을 뜬 난파 선생의 삶에 비추어보면 오해[2]가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 2012년 5월 서울을 찾은 해롤드 박과 홍정임 여사

그들은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을 통해 난파가 우리 민족에 전해주려 한 메시지에는 귀를 닫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비오는 날 한길에 끌려 나갔다가 흙탕물 세례를 받은 것을 보고 나무라는 격이 아닐까?[3]

 

난파기념사업회 일로 분주한 그의 따님 홍정임(洪丁姙) 여사는 2대에 걸친 이화(이화여고)의 딸이다.
홍 여사는 정신과 의사 박호현씨와 결혼하여 그동안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살다가 의사로서 은퇴한 후에는 서부 LA에서 여유로운 노후를 즐기고 있다.
그 슬하에 수지와 해롤드가 있는데 수지는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고 해롤드는 난파 선생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태어나서 지금 건축가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할아버지와 자기 부친의 천재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4]

 

홍난파 선생의 70주기를 기리면서

2011년 8월 30일은 난파 홍영후 선생의 70주년 기일이다.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관련되어 종로 경찰서에 검거되어 72간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는 도중 늑막염이 재발하여 석방은 되었지만 그 후의 3년을 병마에서 시달리다가 43세 란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의 천재성을 감안하면 대단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난파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었고 또 어학에 능통하여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의 한국말 선생이었다.

난파는 두 살 때 가족을 따라 서울 정동으로 옮겨와서 정동교회[5]를 다니며 서양 음악에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는 15세때 “정악전습소”에 입학하여 김인식 선생께 바이올린을 사사한다. 이 천재적인 제자는 1년후에 스승을 앞서기 시작한다. 그 해 말 세브란스 의전 강당에서 열린 성탄 음악회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하여 일약 유명해지고 그 다음 해 부터는 1년에 30회 이상 순회연주를 하며 차츰 바이올리니스트로 데뷰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는 지면관계상 난파 선생의 생애와 활동의 전반을 말씀드리기보다는 그가 남겨놓은 일화를 중심으로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6]

 

바이올린을 전당 잡히고 3.1 운동에 참여

젊은 난파는 17세 때 연희전문 문학과 제1회에 입학하고 그 다음 해에 부친의 권유로 세브란스 의전으로 전학한다. 그는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의전을 1년만에 중퇴하고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부모 몰래 동경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한다. 2년째 되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전당잡혀 독립선언문을 인쇄한다.[7] 난파는 그 때문에 우에노 음악학교 복학을 거절당한다. 그는 서울에 돌아와서 매일신보사 기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소설창작과 세계명작 번역에 몰두한다.[8]

이때 창작집이 여러권 나온다. 그 첫째권이 “처녀 혼”이었는데 그 서두에 “애수”라는 멜로디를 부쳐 내놓은 것이 후에 “봉선화”의 곡이 되었다.
이 “봉선화”를 최초로 부르고 또 널리 퍼지게 한 당대의 소프라노 김천애에 의하면 난파와 이웃에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던 김형준이 작사하였는데 그의 울안에 가득찬 봉선화 꽃이 “우리 신세와 같다”는 얘기를 하곤 하였다는 것이다.
“봉선화”는 한국 최초의 반주곡으로서 창가시대에서 반주시대로 들어가는 첫번째 곡이라는 점에서 음악사상 중요한 맥을 지은 것이다.

 

식민지의 천재 예술가

1921년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전술한 “처녀혼”을 출판하고 같은 해에 “쿠오바디스”를 번역하고 그 다음 해엔 트루게네프의 “첫사랑”을 번역하여 출판한다. 1923년에는 스델만의 “매국노의 자”, 스마일스의 “청년입지론”을 번역 출판하고 에밀 졸라의 ‘나나”를 번역하였다.

같은 시기에 소설 “최후의 악수”, “허영”, 향일초”, “청춘의 사랑”, “폭풍우 지난 뒤”등 창작하고 출판하였다.
그가 23세의 젊은 나이에 “봉선화”,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생각” 등 십여곡의 가곡을 남겼는데 이는 모두 시나 시조에 곡을 접목시키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많이 애창되는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한 100여 개의 동요곡을 작곡하고, “애수” 및 ”로망스”등 8개의 기악곡을 작곡함으로써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만일 그가 오페라 몇 곡만 작곡 하였더라면 그는 "한국의 모짜르트"로 불릴 뻔했다.

1924년에 이르러 소설 “폭풍우 지난 뒤”를 발표하였을 때 술자리에서 수주 변영로가 난파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너 이 자식아 깽깽이나 켜면 켰지 주제넘게 소설은 다 뭐냐? 아 그래 천지개벽하고서 두 가지 예술에 통달 대성한 천재가 있어? 있으면 말해봐.”
난파 왈, “수주 자네도 어지간히 무식하군. 바그너를 모르다니 뜻밖인데, 시인이요, 음악가이신 바그너 말이다!”

수주는 질세라 한 마디 더 한다. “장하다! 그런데 난파, 자네야 말로 그 같은 불세출의 대천재다 그 말씀이지?”
그날 밤 난파는 집에 돌아와서 반쯤 쓰고 있던 소설을 불살라 버리고 문필활동에 종지부를 찍는다.
변영로와 난파는 일본 유학시절 한 방에서 기거했던 막역한 친구였다. 모두가 가난하게 살던 유학시절이니 그 당시 분위기를 알만도 하다.

 

1926년 난파는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한다. 재학중 그는 도쿄 신교향악단 (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하여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하면서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일본 태생의 그 많은 바이올린 주자를 모두 제치고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한국인 선생에게 사사한 한국의 젊은 청년이 제일 바이올린 주자로 부상하였다는 사실이… 한국인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좋은 선례이다.
요새는 정경화 및 장영주를 비롯하여 이런 사례를 흔히 세계무대에서 보는데 이는 이런 재능이 우리 민족의 피속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1931년 7월 난파는 시카고의 셔우드 음악학교 (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로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른다.
가는 도중 8월18일 하와이에 들려 미술관 노천극장에서 첫번 독주회가 열린다. 저녁 부실비에 우산을 쓰고 의자에 앉아서 듣던 청중들이 한곡이 끝날 때 마다 열심히 박수치고 환호해주고 또 꽃 목도리를 걸어주어 대단히 감격하고 흥분하고 득의작약하였다.

난파의 미국유학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수업료를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해야 했고 또 교통사고로 늑골을 다쳐 그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가입 하였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로스안젤스의 흥사단 대회에 참가하였다.

 

민족의 심금을 울린 봉선화

흥사단(興士團)은 1913년 도산 안창호가 미국 샌프랜시스코에서 조직한 민족 독립운동 단체이며, 도산은 “개인이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고 주창하면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그는 항상 인재 육성과 실력 양성을 역설 하였다. 난파의 음악도 도산의 사상에 근간을 두고 있다. 난파는 서민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가요를 양산하여 조국을 잃은 불쌍한 한국인들을 계몽하고 각성시키려 노력하였던 것이다.

 

봉선화“가 널리 울려퍼져 독립을 갈망하던 겨례의 심금을 울린것은 1942년 봄부터였다.
당시 무사시노 음악학교 4학년생이었던 김천애가 히비아 공회당의 전 일본 신인 음악회에서 이 가곡을 불러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한복을 입고 출연한 김천애는 연속되는 앙콜곡을 부르다가 네 번째 곡으로 봉선화를 불러 큰 감흥을 일으켰다.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천애가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서 주권을 찬탈 당한 민족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로 부상하였다. 일제 경찰은 이를 문제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하였지만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 경찰에 연행되었다. 봉선화는 독립을 갈망하는 독립의 염원가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가 오페라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이탈리아의 독립의 대명사가 된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소프라노 김천애는 191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근대음악에 접할수 있었다. 김천애는 경성보육학교 재학시절부터 소프라노 이대형과 단짝이었는데 그들은 공히 난파의 제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우정은 일생 계속되었다.

 

결혼과 옥고, 그리고 득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난파는 소프라노 이대형과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된다. 김천애는 난파와 이대형의 사랑이 싹트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난파는 이대형에게 좋은 남편 감을 소개해 주겠다 하면서 자기 자신의 사진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 소프라노 이대형과 딸 정임을 안고 있는 홍난파. 출처: 鳳仙花 評傳 洪蘭坡 (도쿄 문예사, 2002)

열열한 연애 끝에 그들은 1934년 12월 27일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된다. 몇 년 후 따님을 낳게 되었고, 그녀가 현재 난파 기념사업에 힘쓰고 있는 홍정임 여사이다. 그녀는 자기 출생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진술한 바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던 날 저의 아빠는 종로 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계신 저는 임(姙)자 돌림에다 정축년에 태어났다고 정(丁)자를 붙여서 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 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히 피투성이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 들면서 이렇게 애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몸이 약하신데 제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되느냐?” 일본 경찰은 조롱섞인 어조로 “당신도 콩밥이 먹고 싶어?”반문했다고 합니다.”

 

난파의 업적

난파의 음악활동은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면서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고 또 “간이 무도행진곡집”을 편찬한다.
  • 1919년 동경에서 예술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경영난으로 4호를 마감으로 폐간된다.
  • 1925년 난파는 “세계명작 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거기에 “봉선화”를 수록한다.
  • 1931년 그는 조선음악가 협회창립총회 상무이사로 선임된다.
  •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한다.
  • 1933년 최초의 실내악단 “난파 트리오”를 결성한다. 이는 난파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었으나 3년후 홍성유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해체된다.
  • 1938년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한다.
  •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한다.

 

난파 작품의 음악성

난파의 작곡활동은 모두 일제가 강점한 식민지 시기에 한정되었지만 그의 가곡은 광복 이전부터 애창되었고 광복이후에는 더 널리 애창되고 있다.

“봉선화”는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민족의 노래로 널리 불리었고, “고향의 봄”은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의 국민가요로 남북을 소통하여 애창되고 있다.

 

난파는 멜로디의 작곡에 대단히 유능하였다. 그의 멜로디의 대부분이 한국적인 은근과 끈기를 담고 있다. 이런 은근한 멜로디에 서정적인 시와 동요를 유연하게 접목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가곡은 한국적인 서정을 담뿍 담고 있다.

“봉선화”에는 깊은 애수가 서려있다. 이는 일제의 침략과 모진 압박에 시달려 굴욕과 쓰라림을 당한 조국의 비운을 봉선화에 비유하였다. “비록 모질고 찬바람에 형골마져 사라져 버렸을지언정 혼백이 길이 남아 찾아온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그 애절한 민족의 염원이 “봉선화” 를 단순한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가 되는 거지요.”라고 김천애 여사는 그 3절 가사의 뜻을 강조한다.

이은상 작사의 “성불사의 밤”을 보더라도 넘쳐 흐르는 한국적인 서정을 충분히 느낄수 있다. 첩첩 산속 깊이 자리잡은 우리 불심의 신비스런 정경을 은밀히 그려내니, 먼 길에 지친 만해 한용운의 고된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듯한 정취를 은연히 풍기기도 한다. 난파는 서양의 근대 음악에 깊이 심취되면서 한국적인 서정을 담은 멜로디를 찾아 내는데 천재적인 솜씨를 보여 주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국적인 선율을 찾아내고 그를 우리말 어감과 어투에 맞도록 다듬었던 "한국의 슈베르트"였다.

 

고향의 봄“은 이원수가 1926년 소학교 6학년때 고향인 창원 소답리의 아름다운 봄 풍경을 어린 나이에 지혜롭게 지은 시이다. 이 시가 난파의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금수강산의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니 삽시간에 삼천리 강산이 울긋불긋한 꽃동산으로 물 들어버리는 느낌이다. 이것이 금상첨화의 묘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는 우리의 시와 동요가 서양음악에 곧잘 접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터득하여 우리말의 어감과 어투를 그대로 살려가면서 한민족의 정서를 살릴 수 있는 극히 한국적인 근대음악을 개척하고 또 정착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벨리니 및 도니제티의 음악을 보면 그들은 멜로디의 작곡에 대단히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난파도 그들에 못지 않게 멜로디 작곡의 천재성을 갖고 있었다.

가곡의 성격이 시(詩)의 내용으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 여러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는 사항이다. 바그너는 시를 남성에 비유하고 음악을 여성에 비유하면서 음악은 시의 의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그너의 음악을 음미해 보면 그의 우수한 음악이 그의 시를 아름답게 장식한 결과가 된다. 바그너의 오페라도 그의 뛰어난 음악 덕분에 더 많이 애창되고 청취되고 있는 실정이다.

 

“음악은 시를 장식해 주고, 사람의 육성이 시와 음악에 날개를 돋혀준다”고 흔히 말한다. 따라서 난파의 음악과 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읊어 볼까 한다.

“민족의 얼이 담긴 주옥같은 시 한 수 한 수에 난파의 아릿다운 선율이 색동옷 입혀주고 겨레의 설레이는 육성이 쌍날개를 달아주니 슬기로운 한민족의 얼이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으로 울려 퍼진다.”

난파는 문학 창작에서도 보통 수준을 넘었지만 그의 작곡 실력은 세계 정상급이었다. 그가 생을 제대로 마쳤더라면 그는 벨리니, 도니제티, 베르디 및 바그너에 버금가는 작곡가로 발돋음하여 많은 한국풍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을 것을 생각하면 그를 요절케한 일제의 만행이 한층 더 가증스럽기만 하다.

 

홍난파를 변호함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36년간 식민통치를 하면서 우리의 문화와 민족의 정기와 얼을 말살하려 했다.

일제는 또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와 선각자들을 강압적으로 변절시켜 우리 민족의 정기와 얼을 유린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의 선현들이 일시적으로 굴종하는 체 했는지는 몰라도 끝까지 우리 민족의 정기와 얼을 사수하느라고 개인적인 건강과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다. 일제가 발악하면 할수록 우리 민족의 정기와 얼은 더욱 더 열을 받아 날이 갈수록 강철같이 굳건해져서 광복을 우리와 함께 맞이하였다.

 

이제 우리 민족이 해야할 중요한 과제는 이처럼 피흘려 보존한 민족의 정기와 얼을 이 땅에 굳건히 정착시키고 또 승화 시켜 세계적으로 으뜸가는 문화국으로 도약하는 일이다.

홍난파 선생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제가 조작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오랫동안 수감되면서 결핵성 늑막염을 앓게 되었다. 치료제가 없는 때라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결핵성 뇌막염까지 유발되어 1941년 8월 30일 향년 43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난파는 그렇게 갈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못본 채 눈을 감으셨다.

 

Note

1] 홍난파의 음악성을 기리는 난파음악상은 1968년 정경화가 처음 수상한 이래 한국의 쟁쟁한 음악가들이 이 상을 받아 왔다. 우리 가곡의 날은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의 제안으로 2005년부터 11월 11일로 지켜지고 있으며 이 날 홍난파의 여러 가곡이 연주되고 있다.

 

2] 난파가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썼다고 하지만 당시 그의 처지는 비슷한 입장의 문학가 이*수, 최*선보다도 훨씬 열악했다. 일제는 난파가 감옥에서 오래 못버틸 것임을 알고 석방해준다는 조건으로 "일본에 협조하는 글과 곡을 지으라"고 요구했다. 난파는 늑막염에 시달리는 한편 어린 딸의 재롱을 보면서 삶에 애착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3년 동안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3] 2009년 11월 말 대통령(노무현)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서 홍난파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하려 했다. 그러나 홍난파의 후손이 서울행정법원에 효력정지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유 있다고 받아들여 홍난파 이름을 제외한 1005명을 발표했다. 그 후 위원회는 활동시한을 마치고 해산했으나 2010년 11월 원고 측이 소송을 취하하면서 재판은 종결되었다. 음악계 인사들은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행위를 근거로 친일인사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한국을 음악의 나라로 만들려는 열정을 가진 선각자였다. "조선에 태어난 까닭에 제법 음악가의 대접을 받는 줄은 모르고, 자기가 좀 더 음악국인 딴 나라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이가 있다. 조선을 음악국으로 만들 수 없다는 단언은 대체 누가 했는지 알고 싶다.”(음악만필, 1938) 신도성(화성시 음악협회 이사), "홍난파 친일보고서의 6가지 오류", 주간조선 제213호, 2010.11.22.

 

4] 한수웅 (미주 한미 간(肝)협회 회장), "홍난파 선생의 70주기를 기리면서", 이화여고 북미주 동창회 홈페이지, 2011. 8. 30.

5] 종로 새문안교회라는 설도 있다.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성가대원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6] 위의 이화여고 북미주 동창회 사이트.

 

7] 1920년 난파는 YMCA 운동을 지도하면서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윤치호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요청한다. 그가 바이올린을 갖고 싶다고 추가로 후원을 요청하자 "고학생이 바이올린을 갖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며 거절했다. 조성관, "그는 왜 친일의 길을 걸었나", 주간조선 2239호, 2013.1.7.

8] 빅토르 유고의 "레 미제라블"도 난파가 "아아 무정 (無情)"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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