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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고령 신씨 신용우 (申庸雨, 1912∼1989.12. 4) 님은 넷째집 4남 박훤일의 장인이다. 박내옥 (1912-1996)과 같은 임자(壬子)생으로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는 삶을 사셨다. 두 분 모두 일제강점기 전라도의 벽촌(승주군 쌍암면 : 남원군 운봉면)에서 태어나 가업인 농사를 지어야 하는 숙명을 벗어던지고 신식 교육을 받았다. 형제가 많았고 현모양처형 아내를 만나 많은 자녀(둘 다 4남 5녀)를 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후자(박내옥 님)가 여러 차례의 난관을 헤쳐나오면서 순응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전자(신용우 님)는 난관을 극복할 때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한 단계씩 상승하는 삶을 개척하였다. 운봉 박씨 집안의 사돈이자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도지사를 역임하였고 특히 외손인 박영진과 박영철에게..

회고록 2020.08.15

안부편지 (박내옥)

아래의 편지는 넷째집 박내옥 님이 미국 LA에 사는 조카 박섭용에게 보낸 편지이다. 1989년 봄에 미국에 가서 만났던 것 과 그해 운봉 가을걷이에서 백미 한 가마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섭용 군 즉전 (펴보게) 1989년도 꼭 1개월 반만 남았구나. 유수 같은 세월이라 하였거늘 고희(70세)를 넘기고부터는 날과 달 가는 것이 더 빠른 것 같다. 미국에서 조카와 작별한 지가 반년이 되었으니 말이다.[1] 조카 내외를 위시(비롯)하여 홍균이, 양선이, 계연이 온가족이 하나님 은총 아래 건강하며 만사가 잘 이루어지기를 축원하노라. 숙부 내외는 고희도 훨씬 넘긴 나이에 이만한 건강과 풍요한 생활을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항상 감사드린다. 이곳은 대소가(집안)들이 무고하니 다행이..

수필・편지글 2020.08.15

박내옥

사람은 일생 동안 적어도 세 차례의 고비를 겪는다고 한다. 나 박내옥(朴萊玉)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1] 지난 80 평생을 돌이켜볼 때 어렵고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생각이 든다. 많은 동포들이 고생하였던 8.15 해방과 6.25 사변 중에 生死의 기로를 헤매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행운이랴![2] 지금 돌이켜볼 때 내가 가정을 이룩하고 나서 봉착했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인 애로였다. 평생 월급쟁이를 하였으니 큰 돈 만질 기회도 없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많은 식구를 먹이고 가르치기가 결코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억에 남는 가장 힘든 시기는 우리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온 뒤의 5년간이었다. 1966년 해방후 20년간 봉직했던 전라북도 약품회사가 사실상 영업을 ..

회고록 2020.08.15

자서전

전자족보인 운봉 박씨 이야기에 가족 구성원의 자서전 (自敍傳)도 실었으면 좋겠다. 인생은 자서전을 쓰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도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자서전 하면 성공한 기업인이나 정치인, 유명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자서전을 쓸 수 있다. 아니 생각 나는 대로 회고담을 적는 회고록도 좋을 것이다. 자서전 쓸 거리 다음의 질문에 답을 적다 보면 저절로 자서전이 완성된다. 마치 머릿속에 잠자던 옛날 기억이 팝콘 터지듯 톡톡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꽃피는 내 고향 부모님과 나, 가족 이야기 탄생의 비밀, 태몽 어린 날의 꿈 기쁘고 기쁜 날 인생의 전환점 내 인생의 멘토, 잊을 수 없는 스승 일과 경제 나의 희망사항 내가 아끼는 보물, 첫사랑 행복했던 순간, 불행했던 순간 꿈과 열정..

회고록 2020.08.15

성묘/추도식

성묘 (省墓)란 한식, 추석에 조상의 묘를 찾아가 예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운봉 박씨의 선영은 전북 남원군 운봉면 서천리에 있으므로 적어도 61세손까지의 성묘는 운봉으로 가야 한다. 필자(박훤일)는 2005년 미국에서 선영을 돌보러 오신 섭용 형님을 모시고 직접 차를 몰고 운봉에 다녀왔다. 운봉 성묘길 넷째집 성묘 넷째집의 경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운봉으로 가는 것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용인공원에 유택을 마련하셨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아이들 데리고 용인 에버랜드 놀러갈 때 용인 산소도 들렀다 가거라."[1] 마침 아버지의 기일이 음력으로 8월 25일(어머니는 7월 26일)이므로 우리 형제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추석 성묘를 추석 쇠고나서 첫번째 일요일날 피크닉 삼아서 가고..

남도여행 (박훤일)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훤일(朴烜日, 1953 - )은 2013년 초 3박 4일의 회갑 기념 형제들과의 남도여행을 하였다. 학자로서 화갑(華甲)기념논문집을 만드는 대신 형제, 자매들과 함께 고향인 전주를 비롯하여 남도로 회갑(回甲)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매달 한 번씩 모이는 형제들의 점심식사 모임을 확대하여 마침 한국에 다니러 오신 누님 내외를 포함한 모든 식구들을 초대하였다. 개인사정이 있는 분을 제외하니 필자를 포함하여 모두 9명이 되었다. 왼쪽부터 김민홍, 김삼중, 은희, 정희, 경희, 숙희, 태용, 김혜경, 훤일 형제들과 함께 한 남도 맛 기행 아래의 여행기[1]는 필자의 블로그에서 사진과 함께 볼 수 있다. 첫째날 (2013.1.18 금) 금요일 아침 일찍 우리 일행은 각기 편리한 대로 ..

산사 소풍

산사 (山寺)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오래 전부터 기분전환 삼아 즐겨 찾는 곳이었다. 비교적 멀리 차를 타고 나가야 하고 적당한 높이의 등산을 한 다음 약수로 목을 축이는 것이 일품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놀러갈 곳도 많지만 예전에는 곧잘 산사(山寺)로 원족(遠足)을 가곤 하였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고려 말 나옹 선사 지음 1974년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9월 초에 산사로 소풍을 갔다. 넷째집 박훤용의 아내 김미자가 집안의 어머님들과 고모님들을 모시고 미국으로의 이민을 준비 중인 박섭용 형수의 송별회를 겸하여 서울 근교의 산사[1]로 소풍을 간 것이다. 참석자는 사진 왼쪽부터 훤용형수와 섭..

일여 박의수

일여 박의수 (一如 朴義洙)는 박혁거세 61세손 박태임의 바깥사돈이다. 장녀 박영선(朴瑛善, 1941∼ )이 박태임의 장남 김중기(金重起, 1936∼ )와 결혼하여 기수, 경호를 두었다. 일여 선생은 1958년 상경 후 그의 호를 딴 한의원을 서울 인사동에 개설하였다가 1966년에 영등포구 구로동으로 이전하였다. 일여 선생은 특히 위장병과 부인병에 있어 명의로 소문이 났다.[1] 일여 선생은 무엇보다도 가전비방(家傳秘方)을 발굴 수집하고 이를 널리 공유하고자 노력했던 한의학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경희대 한의과대학의 김남일 의사학교수가 기록한 일여 선생의 업적이다.[2] 일여 선생의 업적 일여 박의수(一如 朴義洙)는 전북 출신으로 1908년에 태어났다. 1928년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을 중퇴..

박태임

박태임 (朴太任, 1915.6.18 ∼ 2011.9.13 음8.16) 은 박혁거세 왕의 61세손이다. 박승재 님과 안동 김씨의 9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나 1935년 전주고등보통학교를 나온 김형귀(金瀅槶) 님과 혼례를 올리셨다. 슬하에 중기 (1936∼ ), 양기 (1939∼2017. 2.11) 두 아들을 두고 일찍이 홀로 되셨다. 그러나 평생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지내셨으며 2011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구로동에서 일여당 한의원을 하였던 일여 박의수가 장남 중기의 장인으로 바깥사돈이 된다. 고모님과의 추억 조카(박훤일)로서 고인[1]의 모든 면을 낱낱이 적을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서 활동하셨다면 어떠하셨을까 상상해보는 것으로 추모사에 갈음하고자 한..

청첩편지 (박규홍)

박혁거세 왕 61세손 박규홍 (朴圭烘) 님은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에서 1923년 1월 27일 태어나 1979년 1월 29일 세상을 떠나셨다. 머리 좋고 향학열에 불탔던 님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도일 유학하여 추오대(中央大) 상학과에서 공부하던 중 태평양 전쟁에 징집되었다. 그러나 본토 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조국 광복을 맞았으나 현지 사정으로 귀국이 다소 지체되었다. 귀국 후에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관재처에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 입대하셨다. 해병대 경리장교로서 종전을 맞은 후에는 일본 파견 상무관 시험에 합격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상공부에 들어가셨다. 중소기업과장을 거쳐 1968년에는 초대 중소기업국장에 취임하셨다. 그 후 상공부 특허국 특허심판관으로 일하다가 대한무역진흥..